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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새벽

[明泉] 맑은 샘물 2024. 5. 17. 14:27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십니까?

그 친밀함으로 어떤 영향력을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새벽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개역한글]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공동번역] 35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들어가는 말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제자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 대해 듣게 되었고, 성경을 기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첫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역을 시작하시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공생애 사역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그리고 그 사역은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지속된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예수님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생애 중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들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건너 뛰고 있습니다.

12살 시절을 이야기에서 그 다음에는 30세 시절을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앞의 태어나면서부터 11년의 세월과 12살 이후의 18년의 세월은 물음표(?)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때의 예수님의 삷은 어떠했을까?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어떻게 사셨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다른 복음서 - 마태, 누가복음(역사적 자료)을 모아서 그 끊어진 고리를 복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시절의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할까요?

예수를 믿는 데 꼭 필요한 이야기였을까요?

만일 예수의 탄생, 성장,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그토록 중요한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록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나 누가도 그 부분은 상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탄생이야기, 12살 때 이야기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하므로 당시 유대인들의 삶을 통해 추정할 수 있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삶있게 한 기도

성경은 침묵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기 전 <기도하심>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했을지 추정할 단서를 제공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순간,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의 "공생애 3년"은 예수께서 오랜세월 기도생활이 몸에 배여있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의 삶의 뿌리는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묻고 하나님 아버지를 따르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던 예수님,

그는 하나님으로 신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새로운 삶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어떤 일은 규칙적이고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 곧 하나님 앞에서 경건(공경할 경, 정성 건)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권세있게 한 기도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 이끌리어' 사십일을 광야에서 지내시며 금식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귀의 세 가지 유혹(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운동을 시작하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권세에 놀랐고,

자신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권위 곧 신적 부르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러한 권위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감의 증거입니다.

친밀감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당시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파묻혀 살던 서기관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서기관에게서 성경을 많이 배우고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배웠는데 주님의 가르침은 서기관하고 같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서기관들에게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세 權勢 = 엑수시아ἐξουσία>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최고 주권적 자유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요19:11)

왠지 똑같은 성경 이야기인데, 서기관의 이야기는 권세가 없었을까요?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그들의 마음에 복종과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분의 전하는 말씀에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큰 힘과 권세를 느꼈습니다.

그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권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바로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애원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 귀신이 예수님께 굴복하였을까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많은 설교자들이, 서기관과 랍비들이 가르치고 전했지만,

이전에는 이런 일들이 이 회당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귀신들린 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 앞에 애원하는 장면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귀신아 나오너라!”라는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귀신은 놀랐습니다.

귀신도 영이어서 영적 세계를 <귀신같이> 그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새로 나온 랍비가 말씀에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습니다.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오히려 미명에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주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고쳐주시고 치료하시고 참된 믿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오늘 읽은 본문과 같이 새벽, 오히려 이른 미명에 일어나셨습니다.

이 날은 안식 후 첫 날 이었으며 헬라어 성경에는 <“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가장 피곤 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번역이 아주 좋습니다.

하루 중에 일찍인데 그것도 가장 깊은 밤인 때,

새벽 오히려 미명에 어둠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그 밤에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강요된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새벽 시간'에 오히려 어둠이 거치지 않은 미명의 시간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분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새벽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의 패턴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으로 새벽을 맞으셨던 것입니다.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그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외로운 곳(홀로 있을 곳)’으로 되어있고,

헬라어성경에는 ‘버려진 곳(조용한 곳)’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곳은 사람이 흔히 찾아오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그런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 밤에 누가 그곳에 찾아서 나올 곳도 아니지만, 예수님은 그곳에 찾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침묵(묵상)기도가 아니라 중얼고리는 기도입니다.

때로는 감격이 격해지면 기도는 흐느끼는 소리와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우리들은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기도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할 때, 긴급할 때에는 다릅니다.

한적한 곳, 쉽사리 방해를 받지 않는 '그런 곳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당신이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간섭밪지 않는 장소로 가셨습니다.

 

왜 이 새벽에 기도를 하셨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새벽 시간은 꿈나라에 가 있는 조용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가장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방해꾼은 자신과의 싸움, 졸려오는 잠밖에 없습니다.

이것들을 이겨내면 새벽에는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 한적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에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 홀로 있는 장소, 외로운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곳에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 사귐으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이 예수을 찾을 때까지 긴 시간, 깊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숙달되는 것이 아니라 길어지는 것입니다 길어지기도 하지만,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특별한 기도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두 가지 권고

여러분도 결심하고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하나는 새벽에 비장한 각오로 도전을 하시기 바랍니다.

피곤하지만,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 영이 깨어서 육신의 피곤을 이기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권고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나아갈 때 의무에 얽매어서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나가셨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일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쁨과 환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육을 이길 수 있는 영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새벽의 시간에 자는 일을 희생시키고 홍해와 같은 인생의 문제에 팔을 내밀게 하시며,

여리고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문제를 돌게 하시옵소서.

소리치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새벽의 기도에 큰 보응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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