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21:15~25)
말씀요약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25)
부활의 주님이 다시 찾아오심은
14절,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한은 이미 앞서 부활의 주님이 두 번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에게 무엇이 없었는가?
이때까지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뉴스처럼 퍼졌습니다.
이성과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는 것이 가능한가?
제자들의 《의심과 불안, 두려움》은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오셨다.
1.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심은
요한은 이미 세 가지였음을 말해 왔다.
①풍성한 삶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영생)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②함께 하는 삶 :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③ 열매 맺는 삶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요 15:7),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이것이 우릴 부르시고 찾아오신 이유이다.
이러한 열매 맺는 삶은 《예수님과 인격적 연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연합은 오직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유지된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주의 길을 따를 수 없다.
2.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식적 언어가 있고, 친근한 언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베드로에게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나게 합니다.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나'입니다.
요나 선지자의 모습이 시몬에게도 투영됩니다. 요나는 실패했으나 놀라운 회복과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예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유희(word play)를 통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교감을 나누고 계십니다.
아침식사를 하신 후 주님은 예수님은 시몬에게 게바(베드로: 반석)라고 하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요나의 아들 시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이름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아람어-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에게 처음 주님을 따랐을 때를 생각나게 하심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연약하고 실패했던 것도 잘 알고 계신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자신이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고, 마치 버려진 돌(베드로)처럼 쓸모없던 돌과 같았다.
예수님은 또 베드로를 부르시고, “너의 이름은 페트로스(베드로)라. 그리고 네가 고백한 진리는 페트라(반석)라. 내가 그(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페트로스(Πέτρος)는 그리스어 이름으로, '바위'라는 뜻의 '페트라(πέτρα)'에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하며 시몬 베드로의 풀 네임을 부르시고,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셨다.
쉬운 말로 번역해 보면 ‘너는 돌이다. 내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의미가 되겠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반석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냥 '돌'이다. 영어성경에는 베드로(Πέτρος) 대신 <a stone>으로 번역했다. πέτρᾳ(페트라)는 반석(rock)으로 반석 위에 지은 집(마태복음 7:24/누가복음 6:48)에 비유로 쓰였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음, 견고함, 영원함의 상징이다.
다윗도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하셨다(마태복음 7:24).
베드로는 혼자서는 견고할 수 없는 하나의 돌이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 때 든든한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지어지는 집(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 비결은 오직 예수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 연합은 사랑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몰타르》로 단단히 고정된다. 반석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베드로(돌)는 무의미하다.
주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베드로는 주마등(무엇이 언뜻언뜻 빨리 지나감)처럼 지난 3년 주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가슴에 꽂힌다. 주님은 이같이 베드로를 찾으시는데 그는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멀리 떠나 있었다.
1)“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17절) 동일한 질문 세 번이나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실패한 제자라는 주홍글씨를 제거해 주시기 위함이다.
"베드로야, 나도 알아! 네가 널 사랑하는 걸. 그런데 그 사랑이 흔들리고 무너지면 안 돼!"라고.
"베드로야! 나는 널 신뢰해.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은 오늘도 베드로처럼 실패한 나도 찾아오셔서 다시 세워 주신다.
주님이 쓰시는 사람은 재능도, 실력도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은 부르고 계신다》
그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치라)” 세 번의 새로운 명령,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만이 아닙니다.
강요나 억지로가 아닙니다.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실 때에는 "내가 그 능력도 너에게 줄게"라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다.
"주님, 주님께서 내 힘으로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이런 뜻이다.
2)“너는 ‘나를’ 따르라.”(21~22절)
그 와중에도 옆 사람, 요한에 대해 궁금해한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 실패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에 빠집니다. 남이야 어떻든지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오직 주님만 따르십시오. 신앙은 주님과 나만 일대일 관계입니다. 주님만을 따르십시오.
♪주남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 신앙생활의 실패 요인은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과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때이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베드로는 바다와 물결을 바라보다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만 바라봅시다.
3.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복음은 세상에 두기에 부족할 만큼 고귀한 것이다. 이같이 말씀을 기록하여 남겨 주심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요 20:31)
“…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 10:43)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 얻는 복음, 죄 사함 받는 능력, 이 권세 있는 복음을 우리로 전하라고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각자가 대답할 차례이다.
▣ 말씀 나눔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적용하고 실천할 주님의 명령은 무엇인가?
2.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과 명령을 주시면서 확인하신 두 가지는 무엇인가?
3.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이며 또 성경을 믿는 자들은 무엇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