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자가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갖기 어려운 이유
초신자에게 신학적 주에인 종말론적 긴장("이미"와 "아직" 사이)을 설명하고,
그리고 신자가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의 과정"에 들어 서기 까지 확신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원의 서정을 이해할 때 자신의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확신을 갖게 된다.
먼저 칼빈은 1)믿음의 정의를 그리스도인의 실제경험과 구분했다.
2)그리스도가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자의 실질적인 삶, 특히 육과 영의 충동을 보면 신자는 정의 그대로의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을 보면 육체를 벗기 전까지 우리는 완벽한 상태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더는 육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아직> 육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믿음의 정의와 신자의 실질적인 경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극심한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무지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특히 우리의 마음이 천성적으로 불안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시험이 끊임없이 우리를 맹렬히 공격한다.
하지만, 특히 죄의 무게에 눌린 우리의 양심이 한탄하고, 신음하며, 자책하고,
남몰래 탄식하며, 걱정으로 요동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의 뿌리는 신실한 가슴에서 절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 (원수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당해도 믿음은 결국 세상을 이긴다.”
웨스트님스터 신앙고백에는 이같이 설명한다.
“이 믿음은 약하거나 강한 정도가 다르고 여러 모양으로 공격을 당해 약해질 수 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국 승리한다.
… 여러 모양으로 자라 완전한 화신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그들이 이미 칭의와 성화, 영생에 대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구원얻는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
“믿음의 본질에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믿음이 완전한 확신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일말의 의심도 없다거나 불안의 공경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확신은 상상할 수 없다.
… 신자들은 자신의 불신과 계속해서 싸운다.
… 자신의 약함과 싸우면서 불안한 순간에도 믿음을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은 이미 꽤 승리를 거둔다.
…따라서 신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달콤함을 느끼며,
동시에 자신의 실패를 인식하고 씁쓸함을 느끼며,
복음의 약속을 의지하는 동시에 자기의 악한 증거에 진저리를 치고,
… 육의 잔재 속에서 잠자고 있던 불신이 일어나 내면에서 잉태된 믿음을 공격하곤 한다. (칼빈기강/3.2.18)
그래서 완벽한 확신은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고, 나는 그분을 의자한다“라고 하는 고백이다.
"온 우주의 그 무엇도 나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고백으로 변해가는 복잡한 영적 심리적 과정이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과정이 신자의 양심과 영혼, 심리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복잡하다.
"구원얻는 믿음의 확신"을 경험하는 일은 두 가지 이유로 복잡하다.
첫째, 우리 인간 존재의 내부가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존재다.
둘째, 확신은 '현대인이 자아상'이라고 부르는 것,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완벽한 확신은 "그리스도가 죄 인을 위해 돌아가셨고 나는 그분을 의지한다"라는 고백이
"온 우주의 그 무엇도 나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라는 고백으로 변해가는 복잡한 영적 심리적 과정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복잡성이 아름답게 단순화되어 더는 그 복잡성이 눈에 띠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목회자가 자의식 속의 이런 (성도들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정황들)복잡성을 풀어주어야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것의 실질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의 분명한 연관성을 보게 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음 장에서는 이 주제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