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오직 자국의 이익과 안녕을 챙겨야 하기 때문
미국은 <러일전쟁> 시기에는 일본의 편이었습니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얼추 중립 같기도 하고, 일본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과 싸웠습니다.
해방 뒤에 소련의 등장할 때에는 다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의 손>을 들었습니다.
그 틈에 우리 독도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강화조약 문서에 독도가 빠져버렸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은인이 됐습니다. 저는 친구(미국)를 의심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역사의 법칙은 냉엄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한국이 어떤 상황의 변화에도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가야 한다.
-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에서 -
한반도가 처한 상황
▪︎ 러일전쟁(1904∼1905년)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미국은 러일전쟁 시기에는 일본의 편이었습니다.
러시아(공산당)의 남하전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 일본과 미국의 비밀 협정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 또는 가쓰라-태프트 협정(協定) 또는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agreement)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이 밀약을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간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이 있었다.
▪︎ 중일 전쟁 (1937. 7. 7~1945. 9. 2)
중일전쟁 시기에는 얼추 중립 같기도 하고, 일본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고 했다.
▪︎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미국과 일본 제국 전쟁(1941년~1945년까지)
그리고 이제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과 싸웠습니다.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연합하여 미국이 동아시아의 지배력을 갖지 못하게 하고, 일본이 독식하기 위한 벌인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우리 땅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통치한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1946년 1월 29일 각서 제677호를 통하여 독도를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일본 땅에서 제외하였다.
1946년 6월 22일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033호로 일본 어부들이 독도와 그 주변 12해리(약 22km)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거듭 확인하였다.
해방 뒤에 소련의 등장할 때에는 다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의 손을 들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이 한반도에서 북한을 도와 전쟁을 일으킴으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의 군수산업을 통해 무기를 조달함
그 틈에 우리 독도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강화조약 문서에 독도가 빠져버렸습니다.
샌프란스시코 강화조약이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체약한 조약이다. 이 조약에는 미국, 소련, 영국을 비롯해 48개국이 참가하고 서명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공표됐다. 이후 지금까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이 마치 미국의 책임인양 떠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냉철하게 보면 약소국이 겪는 설움이다. 우리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신민지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조약 참가국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한국은 강화조약의 일원으로 참가하고자 했지만 과도한 배상을 우려해 한국을 배제했다. 나름의 논리도 있었다. 그들은 (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한 단체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에 출범했기 때문에 한국에 교전국의 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고 했다. 현실적으로도 한국은 전쟁 중이어서 참가가 힘들었다. 한국이 참가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독도 문제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https://www.dg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812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은인이 됐습니다. 저는 친구를 의심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역사의 법칙은 냉엄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이 어떤 상황의 변화에도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가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연설에서)
지금도 더욱 복잡해졌다.
공산주의 세력인 러시아, 중국, 북한과 대한민국, 일본, 미국이 각각 협력하고 있어 늘 긴장 속에 있다. 어딘가 균형이 깨지고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자원과 시장을 개방하고, 교류하지만 때로 자원을 무기 삼거나(일본이 반도체 소부장을 우리나라 수출금지) 교류를 단절함으로써 (사드 배치문제) 백기를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일본에 자원을 무기로 백기투항하게 만듦). 외국에 군대 파병문제 등.
자국의 이익을 위한 보이지 않는 국제 간 알력들이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우리나라의 번영, 그리고 안녕은 오직 우리가 힘이 있어야 지켜낼 수 있다.
역사읽기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고대 근동아시아의 앗수르제국, 이집트 제국,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유과 아시아를 잇는 알렉산더의 영토 확장, 로마제국, 몽골제국, 오스만제국에 대해 알고 있다. 또 나폴레옹제국과 대영제국, 수많은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쟁탈전,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러시아, 일본제국의 동아시아 점령 등 수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 국가의 흥망 성쇠가 있었다.
우리 한반도의 역사만 놓고 보아도 외세의 수많은 침략에 맞서 저항하며 독립을 이루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좌지우지되어 왔다.
역사는 면면히(constantly) 흐른다.
국가나 개인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역사이기에 역사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언제나 역사를 써 가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형세를 읽는 혜안, 그리고 적과 맞서는 병법, 그리고 책사는 매우 중요하다. 위기를 극복하고 수성할 수 있는 계책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다윗 왕의 주요 참모는 군대장과 요압, 사관인 여호사밧,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서기관 스라야 그리고 책사 후새 등이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이자 정치 고문의 역할을 했다. 특별히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반대편인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력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쿼드, 21세기판 그레이트게임…입지 좁아진 한국
(박차영, 2021.03.13)
19세기와 달리 미국 주도, 상대는 중국으로 전환…구한말 상황 재연되나
19세기에 초강대국인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정치외교 용어로 정착된 그레이트게임은 대략 1830년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한다. 그레이트게임은 러시아가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영국이 인도를 중심으로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서 비롯되었다.
영국은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등 1만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간다.
영국에겐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다. 이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이 영국과 손을 잡는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다. 일본과 손을 잡았다.
영국은 인도-호주-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한 것이다. 영국과 손잡은 일본은 청나라(청일전쟁)와 러시아(러일전쟁)와 싸워 승리한다.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게임이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중심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로 여전하다. 또 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란 사실이다.
미국 시간으로 12일,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코로나 위기 속에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네 정상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일 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4개국 정상은 회담 후 성명에서 "우리는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라고 밝혔다.
4국이 겉으로는 내세운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다.
중국이 지난해 카슈미르 산악에서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한 것이다.
성명에서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정세 분석가라면 누구나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명은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성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했다.
성명은 미얀마에 대해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의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하고, 특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한 정책기조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다. 19세기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더 복잡하다. 그땐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우리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그 섬을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묄렌도르프는 임오군란(1882)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처럼 중립화를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개화파 유길준(兪吉濬)>이었다.
그는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 남하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 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이 조선반도에 주도권을 쥐던 시절에 조선 중립화론은 청이 조선의 속국 상태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주장에 그쳤다.
조선(고종)의 선택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세력에 청을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하고, 해양세력인 일본의 외교적·군사적 역량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한다.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이다.
고종은 이듬해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다.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갔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위키피디아
100여 년이 훌쩍 지난 2020년대인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우방이면서도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박근혜 정권 때에도 대통령이 2015년 항일전쟁 승전 7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천안문 망루에 섰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 보수정부보다 더 중국에 경사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등거리 외교의 입장을 취한 것의 연장선상이다.
판세를 잘못 읽은 고종
19세기말 조선의 고종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고종임금은 지는 나라 쪽에 계속 붙으려 했다. 그의 중립화론은 강대국에 의해 거절당했다.
지금의 한미 거리 조정도 어쩌면 19세기의 재판일 수도 있다. 중국이 떠오른 나라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아직은 허술한 구석이 많다.
중국은 홍콩의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미얀마 군부를 묵시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력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의 화웨이 규제에서 보듯, 무력하기 짝이 없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다.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선택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Wikipedia, 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White House, Fact Sheet: Quad Summit
White House, Quad Leaders’ Joint Statement: “The Spirit of the Quad”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47
쿼드, 21세기판 그레이트게임…입지 좁아진 한국 - 아틀라스뉴스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정치외교 용어로 정착된 그레이트게임은 정확하게는 1830년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한다.
www.atlas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