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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게마트리아 해석에 대하여

[明泉] 맑은 샘물 2023. 12. 10. 16:22

복음서에 갈릴리 호수의 어부요 제자였던 베드로가 많은 고기 잡은 사건은 두 번 나타난다. 
그 첫 번째 사건은 제자가 되기 전이다(눅5:1-11)
어느 날,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깁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아직 베드로는 바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인간 나사렛 예수 곧 율법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분으로만 알았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는 베드로에게 지금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 하고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
의 경험을 들어 이 시간에는 '지금 당신 말대로 해 봤자 헛수고입니다'라고 할 것인가?
베드로는 이때에 어떤 결정을 했습니까?
그리고 대답하여 시몬이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5, 개역한글)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Σίμων ⸀εἶπεν· Ἐπιστάτα, δι’ ⸀ὅλης νυκτὸς κοπιάσαντες οὐδὲν ἐλάβομεν, ἐπὶ δὲ τῷ ῥήματί σου χαλάσω ⸂τὰ δίκτυα⸃.” (눅 5:5)

ἐπὶ ~ 위에, 가까이에, 근처에
δὲ : 그러나, 게다가, 더구나, 오히려, 지금

ἐπὶ주, ἐπιστάτης(G1988: 주, 선생님, 지배자 통치자, 장관, 감독, 두목 등) 누가복음에서 6회 사용됨

“And Simon answering said unto him, Master, we have toiled all the night, and have taken nothing: nevertheless at thy word I will let down the net.”

그렇지만(nevertheless)
그래도 역시(but yet, nevertheless)
그럼에도 불구하고(for all that, nevertheless, yet)
이 말은 자신의 경험으로는 썩 내키지 않지만, 당신이 그리 말씀하시니 해 보겠습니다. 반신반의하는 태도입니다.

그렇다. 베드로에게는 “선생이여"라고 인간 예수로 불렀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는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생각과는 다른 결과가 일어났다. 잡히지 않아야 할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졌다. 베드로는 놀라며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여 함께 두 배에 고기로 가득 채웠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무슨 잘못을 했나?
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즉,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도 당신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당신은 말씀에는 전문가이지만, 나는 이 바다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이제 곧 내 말이 증명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하하 내 말이 옳다는 것을!"
그래서 베드로는 놀랐다.
어찌 이 바닷속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이 시간에 어떻게 물고 떼가 지나갈 것을 알고 또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췄을까?
이것은 물고기들을 우리들이 쳐 놓는 그물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내 마음속(내 생각들조차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내가 틀렸다는 것, 내가 속으로는 믿지 않았다는 것을.
또 이 바다에 물고기를 주관하는 신은 "얌"이라는 신인데, 당산은 얌신 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닙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당신은 내 마음도 들여다보시는 분입니다.
이제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당신을 속으로 무시하고 당신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여 확증적으로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대답이 아니고는 이 대화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베드로는 정직했고, 사실을 인정했다. 이것을 아셨던 주님은 훗날 제자 삼았을 때 베드로를 수제자로 세웠던 이유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베드로야 너는 정직하구나.
너는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다.
이제 내가 너를 제자로 삼아도 되겠구나.
이 대화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눈빛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꾸며 본 것이다.
베드로는 곧(즉시로)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는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제자의 길에서 실패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때이다(요 21:1-11).
이 때에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가 아니라 새벽에 바닷가에 나타나신 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의 말에 순종한다.
갈릴리 호수라고도 불리고, 디베랴 바다(원문은 티베리우스이다. 이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로마 티베리우스황제로 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이것으로 수도를 옮기고 황제의 이름을 붙인 도시)의 북동쪽에 거주하던 어부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순정하여 그들의 어부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을 따랐다. 사람 낚는 어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저들이 예수를 따른 지 이제 3년이 지났고 저들이 따랐던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저들에게 두 번 이상 보이셨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는 저들과 계속해서 함께 계시지 않고 나타나 보이셨다가 다시 사라지곤 하였다. 그 후 어부 제자들은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오게 된다. 저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니 다른 제자들 6명도 함께 따라 나셨다. 저들이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날, 이제 어둠이 가시고 막 먼동이 터오려는 순간, 아직 태양은 산 뒤에 숨어 어둠도 남아 있었다. 날이 새어갈 때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서 저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다.
그런데 전혀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많은 고기를 잡혔고, 배가 잠길 지경으로 큰 물고기만 골라서 잡힌 것이다.
이때에 요한은 즉각 알아챘다.
“주님시이시다” 하니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께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숯불까지 피워 두고 계셨고 생선과 떡을 준비하여 놓고 계셨다.
물속을 수십 번도 더 들락였던 터라 온몸은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예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시니 베드로가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려 확인한다. 그 물에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다.
이 같이 많은 고기가 잡혔음에도 '(세마포로 만든)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했다는 그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한복음 21장은 실패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던, 원점으로 덜아가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오신 장면이다.
[요 21: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또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부활 전 기적과 부활 후의 기적 이야기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각자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1. 이전의 베드로와 이후의 베드로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2. 그물과 물고기는 어떠했는가?
3. 왜 사도 요한은 물고기 숫자인 153마리가 잡혔다고 숫자까지 넣어 기록했을까?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숫자를 해석하는 방법을 내려왔는데, 이를  게마트리아( גימטריה, gematria)라 한다.  아라비아 숫자가 등장하기 이전에 히브리인들은 히브리 문자(알파벳)를 숫자로 치환하여 사용해 왔다.
이는 옛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수비학의 신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다윗은 문자적으로는 사랑을 의미하고, 숫자로는 14이다. 이처럼 그 단어를 파자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각 알파벳에 숫자값을 각 문자에 정해진 숫자들을 더해서 그것으로 성경의 숫자나 상징을 해석하는 학문을 말한다.
로마 황제 "네로"는 헬라어 알파벳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모두 더하면 666이라는 숫자가 된다.
그러면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글자를 알파벳 숫자로 표기하면 어떤 숫자가 나올까?
하나님의 아들들인 히브리어 '베니 하 엘로힘'은  알파벳 숫자들을 나열하여 더하면 《153》이 된다.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 사건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고 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고,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제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고기나 낚고 있을 때 찾아오신 주님은 제자들, 특히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시고 돌보라고 3번을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주께서 맡기신 양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의 백성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지는 자들이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이러한 내용을 숨겨서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사실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고 우연히 숫자가 맞아서 그렇게 해석된 것일까?
당시에 베드로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세네파 세례자 요한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복음서를 기록하고 후기에 넣은 것은 아닐까?
왜 성경은 이러한 숫자 들로 풀어야 하는 것들이 생겨났을까?


153마리 물고기

유대인들의 수비학으로 153이라는 숫자를 풀어보면, 특이한 의미를 갖는 숫자이다.
즉 1의 세제곱 1,
5의 세제곱 125,
3의 세제곱 27을
이들의 총합은 153이 된다.
이런 숫자를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고 부른다.
뉴대인들에게 이런 게마트리아 해석을 따라 큐브를 수비학으로 플어보면 세제곱을 의미하고, 또한 정육각형을 의미하고, 지성소를 의미한다.
지성소는 정육각형으로 매우 독특하다.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똑같다.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10규빗으로 동일했다.
지성소(至聖所, קֹדֶשׁ הַקֳּדָשִׁים 코데쉬 하코다쉼 - 거룩한 것의 거룩한 것)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출 30:6). 그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을 의미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일서 1장 1절)
천재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우주는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수학(기하학)으로 풀어 내려 애썼던 인물이다.
어찌 보면 그는 하나님이 우주에 수많은 신비들을 수로 숨겨 놓았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 비밀이 너무나도 정밀하고 오묘했다.
따라서 153이라는 숫자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성막에 만들어진 지성소 역시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니 않았고, 에스겔이 본 환상의 천국도 그와 같은 신비가 숨겨져 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지상에 임재하여 계시는 상징이며, 에스겔이 보았고, 사도 요한이 본 천국에 대한 이야기도 크기가 숫자로, 노아의 방주의 크기도, 홍수기간 등에도 숫자가 숨겨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까지 들어가는 과정에 42번 이사한 것도,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의 숫자를 42로 맞추어 놓은 것도....
153이 지성소의 상징이든 아니든 하나남이신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함께 하셨다.
즉,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그곳에 임재하여 계셨다.
그리스도의 오심(초림), 찾아오심, 다시 오심(재림)... 이 모든 것이 하나니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자기 저주의 맹세를 하며 세 번이나 부인했던 실패자요, 배신자요, 무능한 제자였던 그에게 주님은 그가 원점으로 되돌아갔을 때 찾아와 주셨다.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주님 곁을 떠났지만, 아니 아주 이별을 고했던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친히  찾아 오셔서 그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앞에, 그리고 그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실 것을 일려 주셨다.
요한이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 153마리》라고 일부러 기록해 놓은 이유가 이러한 유대이들의 전통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임재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베드로와 같은 실패하고 배신하고 불신하고 떠났던 사람들도 언제든지 찾아오사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으시고, 또 그가 친히 우리들의 거룩한 지성소(하나님의 임재)가 되어 주시겠다는 의미는 아닐까.
지나치게 수비학적 게마트리아를 가지고 풀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큼은 묵상하며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
기이한 일 곧 주님이 우리의 주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분,
다시 시작하는 사명을 주사 양 떼를 돌보게 하시는 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시는 분이심은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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