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창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형상(첼렘)》을 따라 우리의 《모양(데무트)대로》 우리가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וַ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
여기서 성경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만물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당시 애굽의 신화, 가나안 신화, 그리스 신화, 갈대아 신화 등 창조설화가 있었다.
그런데 고대국가시대에도 국가 간 왕래를 통해 각각의 신화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즈음에 이 모든 이야기가 허구이고,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신화들이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우주와 만물, 그리고 인간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렇다고 진화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창조이야기는 꾸며낸 거짓신화를 박살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자기들의 신화가 맞다고 서로 우기는 신화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것과 같았을 것이다.
성경 저자는 하나님이 하늘과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함으로써 하늘의 태양이나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던 애굽의 태양신도, 메소포타미아의 달신도, 가나안의 폭풍우의 신도, 모두 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또 반인-반수의 신도, 그리고 진흙에서나, 신이 죽어서 인간이 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선언
인간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 곧 존재의 원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은 듣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도 아니고, 당시 왕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노예도 심의 형상이라고, 피부색이나 어떤 종족도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것, 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이 선언은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사람에게 생명(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 또한 창조주이신 하나님(당시 수많은 우상들, 거짓 신들)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개념의 어원과 기원 및 그 의미는 무엇인가?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접속사 없고 나란히 등장한다(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 이 말은 《형상과 모양》을 분리하지도, 구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 בָּרָא אֹתָם׃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God’s image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창 5:3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형상과 모양은 서로 같다는 의미이다.
형상 = 모양, 여기서 "자기 모양"은 '자기와 같은 것(모양)'을 가리킨다. 유사한 언어를 반복해서 함께 쓰는 것은 강조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 아들은 나를 진짜로, 정말로 닮았다".
영어로 In 정말로 and 진짜로.
형상(H6754: צֶלֶם, 첼렘, image) 형상, 닮음
첼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창 1:26; 창 1:27; 창 9:6), 사람의 형상(겔 23:14; 시 73:20), 인간의 자기와 '닮은' 아들(창 5:3), 그림자나 허상(시 39:6), 우상(왕하 11:18; 겔 7:20; 겔 16:7, 암 5:26, 민 33:52), 독종의 형상(삼상 6:11)에 대해 사용되었다.
모양(H1823: דְּמוּת 데무트) 닮음, 같은 것
데무트(명여)는 다마(H1819: 같다, 닮다, 유사하다'에서 유래, '닮음, 닮은 것, 유사(성), 같은 모양(likeness, similitude)'을 의미한다.
'닮음, 같거나 닮은 것'(사 13:4, 겔 23:15, 시 58:4, 겔 1:16, 겔 10:10).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 여기서 모양(데무트)은 형상(첼렘)을 한정한다. 즉, 인간은 바로 '형상'이 아니라, '닮은 모양이나 형상'이다.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흙으로 된 인간 육체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육체와 생기가 결합하여 생령 된 몸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영이 거하실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몸에 두셨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은《하나님의 영적, 지적, 도덕적으로 닮았다》는 말이 된다(참조: 엡 4:24, 고전 1:30).
타락 이전과 이후의 하나님 형상
하나님은 비물질적인 분 곧 영이시며 창조주이시다(신 4:15-19, 요 4:24~25).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을 영적, 지적, 도덕적으로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영적 측면》이 심각한 손상으로, 회복불능의 상태로 죄의 영향력 아래 있어 더럽혀지고 훼손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만이 이를 회복시키실 수 있으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벽하게 드러났고, 구원이 완성될 때 우리에게 있어서도 완전해질 것이다(히 2:6-15).
인간이 타락한 후에 성경은 인간의 영적인 기관에 대하여 다양하게 언급한다.
인간에게는 영혼, 마음, 심령, 생각 등으로 언급한다.
살아있는 영혼
창세기 2:7절의 생령(生靈, Living being,
'생령'은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입니다.
'하야'는 '살아있다'는 뜻이고, '네페쉬'는 '숨 쉬는 존재'라는 뜻으로 식물과 구분하고 있다.
또한 '산 영'(living soul)으로 동물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 된 존재인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유일하게 찾고 예배하며, 인격적인 사귐이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soul)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견해들
1. 이레니우스 견해
교회사에서 초대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70인역에서 구분하게 된 것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이해의 특징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양’을 상실했고, 반면에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타락으로 상실된 ‘모양’은 구속의 과정을 통해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회복된다》고 보았다.
2.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이레니우스의 이분법적인 인간 이해를 거부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닮은 점을 영혼, 즉 정신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정신》으로 보았다.
첫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둘째는 인간의 영혼이 곧 하나님의 ‘모양’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참여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3.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에서 찾았다. 그는 지성이 신적 특질이기에 타락 후에도 여전히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4. 종교개혁시대
종교개혁시대에는 스콜라주의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는 도식을 거부하고, 인간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만 이해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형상’과 ‘모양’은 동의어로 보았고, 이는 분리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루터와 칼빈도 ‘형상’과 ‘모양’을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하지만 그들 간에도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인간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보았다.
칼빈도 루터와 같이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지 않았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인간 본성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아담이 부여받은 완전성을 지칭하는 바 명료한 이성, 이성에 복종하는 지성, 적절히 통제된 감성, 창조주가 부여한 모든 탁월하고 찬탄할 만한 재능들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는 인간 전존재 즉, 정신과 마음, 혼과 그 능력이지만, 육체의 모든 부분 가운데 다소라도 영광의 빛이 비취지 않은 부분은 있을 수 없다.”
칼빈은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의 빛 아래서, 순수한 마음 안에서, 모든 건강한 각 기관들 안에서” 보여질 수 있었다.
즉, 타락 전에 인간은 완전한 상태로《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죄로 인하여 그 형체가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말한다.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칼빈은 하나님 형상의 “흔적”(lineaments) 혹은 “잔여물”(remnant)이라 부른다.
또 그는 “자연적 은사들”이라고 불리는 이성과 의지도 타락 후에도 여전히 인간 속에 남아 있고 전적으로 상실되지는 않았고, 죄로 인해 《부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음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인간의 타락의 파괴력에 대하여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대부분의 스콜라주의적 신학자들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들은 타락 후나 전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이러한 견해를 배격한다.
칼빈은 그는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성품과 은사들이 철저하게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도무지 회복 불가능하게 완전히《망가진 상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
1.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칼빈은 이처럼 죄로 인해 변질되고 부패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성령의 사역은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의 은총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이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말한다.
2. 오직 성령께서 역사해 주심으로 가능
하지만 우리의 믿음에 어떤 노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는 은사로 말미암는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하신 그 일(구원)을 믿으며, 그 은혜, 그 놀라운 구원의 소식인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이 반응 역시 우리가 만들거나 생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철저하게 성령에 붙들릴 때 가능한 것이다.
https://youtu.be/GCkTHGgKkE8?si=nNOuLm2baSKBoURH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면
너 어려울 때 힘 주시고 언제나 지켜 주시리
주 크신 사랑 믿는 자 그 반석 위에 서리라
너 설레는 맘 가다듬고 희망 중 기다리면서
그 은혜로신 주의 뜻과 사랑에 만족하여라
우리를 불러 주신 주 마음의 소원 아신다
주 찬양하고 기도하며 네 본분 힘써 다하라
주 약속하신 모든 은혜 네게서 이뤄지리라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아멘
이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가르치고 있다.
참조
http://theologia.kr/board_system/47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