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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탄식, 이 것이 인간이다(2)

[明泉] 맑은 샘물 2023. 11. 7. 17:17

구원과 율법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과 자유, 그리고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약속)을 맺으시고, 율법(계명)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야합니다.
또 그 땅에 하나님 나라(통치)가 이뤄지도록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방식은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온전히 율법이 실현되는 그런 나라, 다윗시대가 가장유일합니다. 다윗 시대가 가장 예배가 왕성했습니다.
시편 119편은 《율법찬가》의 장입니다.
여기서 우라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발로였습니다.
율법 사랑은 곧 여호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복된 삶이고, 그런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172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다윗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기둥이며, 울타리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순기능입니다.
율법(계명)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의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교훈, 가르침)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입니다. 계명들도 거룩합니다. 또한 의롭고 선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세운 바도가 아니기에 신령합니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이와같이 율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려는 자에게 주시는 순기능 역할을 합니다.
구원받은 사함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이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심을 알기에 율법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광 돌리기를 기뻐하므로 우직하고 순전하게 욥처럼 하나님 앞에 순결하기를 소망합니다.

율법준수자들이 율법을 훼손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법을 바르개 지키겨 준수하겠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율법이 무효화시키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이러한 변질은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사랑과 자기 사랑 사이에서 갈등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사랑을 하나님 사랑인 것처럼 둔갑시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 《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무효화시키다)"(마 15:6).
여기서  '폐한다'(ἠκυρώσατε 에퀴로사테)는  '권리를 빼앗다'라는 의미의 법률 용어입니다.
이 말은 "어떤 명령이나 유언을 취소 또는 무효화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15장 3절의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는 말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렬한 범죄상을 일컫는 말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해석을 절대시하여 본래 주셨던 율법보다 더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지키려 애쎴던 것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조상의 유전(율법해석에 관한 구전들)을 절대시했습니다.  
그 해석들은 심지어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뜻을 말살시키는 악행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코르반
(κορβᾶν, a gift offered to God)
포로기 이후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 느헤미야의 개혁에 동참했습니다.  
그 개혁운동은 바빌론 포로 이전에 지키던 하나님의 명령(율법, 계명, 규례, 율례)을 회복하고, 온전히 지켜 신앙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느 10:29).
1)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것(느 10:30), 2)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느 10:31),
3) 성전을 위한 세금(느 10:32-33),
그리고 바로 4) 고(코)르반(장자, 첫 새끼, 첫 곡물, 첫 열매 등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느 10:34-39).
여기서 코르반은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일컫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레 27:28)"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왔을 때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섬김과 부모 공경이 충돌할 때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일조와 부모공경이 그 충돌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고르반~!’ 하고 맹세하였다면, 그것이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취소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 5계명,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 하리라" 이같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2)
고르반이 제 5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부모공경을 무너뜨리는데 악용되었습니다. 부모님이 거주할 집이나 효도관광이나 배려(생활비, 용돈)해야 할 돈을 마치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것처럼 "고르반~"하고 외치면 부모 부양의 책임이 면제되었습니다.
그 돈이나 물건은 절대로 못 건드립니다. 예를들면 어느 자식이 집이 2채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자기 자식들에게 주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깝습니다.
그래서 그 집 한채를 "고르반~"합니다.
주변에서 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느냐고 하면 "나 그 집, 고르반~ 했어" 라고 하면 누구도 거기에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마가복음 7: 11)
여기에 딱 맞는 말이 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없고 젯밥에만 관심있다."
자기는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랑하며 의시댑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지켰다면 문제가 덜 하겠지요.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 바쳤느냐. 아닙니다. 부모 죽을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여차 여차 해서 고르반하였는데,
".... "
그리고는 일부분에 해당하는 헌물만 하고는 다시 되돌려 놓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오용하고, 악용하는 자들이 생겨났는데,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담긴 장로의 유전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읽는 미드라쉬나 특히 탈무드는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읽는 탈무드는 그러한 내용은 빼놓고 번역한 것들이지요.
그러므러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은 장로들의 유전도 포함됩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롬 10: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와같이 마음의 부패하여 신앙도 부패하고,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점차 율법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에는 오도(誤導)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To lead someone astray)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헬라어로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디카이오쉬네 데우), Righteousness of God)이며 한자로 의(義)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 성실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열심을 일컫는다.
사람들도 의리가 있습니다. 한 번 말한 것, "남아 중천금" 반드시 목숨을 버리더라도 지킨다는 의미이지요.
하나님의 의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래의 바울의 말을 꼼꼼히 읽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롬3 :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그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십니다.
즉,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십니다.
성취하심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율법(계명)》은 하나님의 의의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못지킬 것도 아셨다. 그러나 지키는 것만큼 복입니다.
그래도 다 못지킬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용서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인간의 행위로는 의로울 자가 없기에 매년마다 정한 절기 《대속죄일》에 그간의 모든 죄를 덮어 주시는 의로움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자들에게 용서, 대사면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믿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약속(언약)이 변하거나 바뀐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 곧 의로움(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가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시적으로

율법지킴 운동
알랙산더 대제 사후에 4개 국가로 분열되고, 시리아지역의 셀루커스 왕조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 4세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을 헬라 문화로 개종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율법을 금지하였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했다. 이 때 끝까지 정절을 지킨 사람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른다.
B.C 3세기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 자기들을 약속의 땅에서 내쫓으셨고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 나타난 무리들이 하시딤(경건한 무리들)이다. 바로 이 '하시딤'에서 '바리새파'가 나왔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하임 예레미아스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받아들이며, A.D. 1세기에 바리새파는 6천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하시딤의 후예로 바리새파('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하다')와  에세네파가 나타났다. 바리새인들은 랍비들의 전승까지 기록하여 '구전 율법(기록된 율법과 상당히 멀고 얼토당토 않은 주장들도 많이 포함 -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게 된다. 사두개인들이 기록된 율법만을 엄격하게 고수한 점과는 차별이 있다. 사두개파는 구두상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바리새파의 견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에세네'라는 이름은 '침묵', '경건'을 의미한다. 오직 남성들로만 구성된 집단으로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매일 정결예식을 행하며 종말을 기다렸다. 에세네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부터 자극을 받아 생겨난 새로운 종파라고 할 수 있다.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파와 비슷하게 엄격한 입장이었다.
이 세 종파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더 <의>롭다는 것을 자랑하며,  그들의 구전(장로들의 유전)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기록된 성경의 율법을 약화시켰다. 또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으로 백성들의 생각과 삶을 옭아매는 족쇄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 행위의 결과는 하나님의 의를 따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기 자랑, 자기의 의를 쌓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매번 부딪친 것은 이러한 자들, 자기들이 철저히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롬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됩니다.

양날의 칼

인간의 마음이 부패할 때 죄가 들어오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죄가 교만을 타고 들어와 속입니다. 저기 노력으로도 계명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도리어 《외식》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외식의 신앙은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게 했습니다.
동일한 율법이거늘, 변질된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간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고, 죽게 만듭니다.

롬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그때부터는 죄가 지배합니다.
옛말에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처럼, 완전하게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모습을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은 탄식하며 자신을 누가 건져 줄 수 있을까.
마침내 깨달은 것은 바로 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영으로는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음이 섬기는 것과 육신이 섬기는 것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분명 거듭났는데, 우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법(율법, 계명)을 섬기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신은 죄의 법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이고, 죄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 두 법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기만 하면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가능하면 죄의 법을 죽이고 하나님의 법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기 때문에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죄에 빠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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