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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믿음'이라고?(1)

[明泉] 맑은 샘물 2023. 11. 6. 02:10

갈라디아서는 행위(율법으로) 구원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유대주의가 침투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오직 복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았는데, 사람의 눈치를 보고, 환경을 보고 다시 율법에로 돌아간다면 그 신앙은 외식하는 신앙이다.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를,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갈 2:11)을 상기시키면서, 이것은 베드로가 아직 율법에 대하여 자신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드러낸 것(외식) 모습이다.
바울 자신은 율법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이와 같이 천명합니다.
"내가 참으로 율법으로 인해(말미암아), 율법이 (이미) 죽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원하기 때문이다."
(갈 2:19)
“ἐγὼ γὰρ διὰ νόμου νόμῳ ἀπέθανον ἵνα θεῷ ζήσω· Χριστῷ συνεσταύρωμαι·”
“For I, through the law, died to the law, that I might live to God.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율법에 대하여 율법이 죽었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을 의미한다.
이미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도 않으며, 전혀 영향을 받지도 않고, 더 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자유하다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유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에 대해 죽었나니
헬라어 ‘아폐다논(죽었나니)’은 다음 절의 '쉬네스타우로마이(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아~, 나는 너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이미) 내 안에서 죽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죽었고/사망),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

"율법이 죽었다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사건으로 "죽음으로 종결되었음"으로 "나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습니다.《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던 옛사람》이 이미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처럼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선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의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을 함께 못 박았고,
또 못 박혔고,
그때 나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던 《율법 : 하나님의 공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하는 죄의 삯을 지불하셨고, 그 율법 곧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이루심, 성취)하심으로,
이제는 그 율법이 나(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율법의 요구는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는 완성(텔로스)되었다.


율법의 성취, 완성, 종료

여러분에게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다른 표현으로 "예수의 죽음"이며, ‘율법의 요구도 ’는 말은 더 이상 율법이 간섭하거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
이러한 표현들은 결코 사변적인 표현이 아니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자신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 두 고백에 담긴 비밀의 깨달음은 사도 바울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있었기에  그토록 놀랍게 그리스도를 위해 부름의 사명의 길을 달려가도록 만들어 주고, 또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이 일만 생각해도 지치지 않는 무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율법은 우리를 더욱 강력하게 너는 죄인이라고 송사하고, 그 송사가 들려올 때마다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이처럼 율법은 인간(내)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든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도 바울처럼 탄식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하나남의 공의인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며, 우리 존재 자체(자아)가 죄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절망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만든다.
"주여, 이 죄인은 어찌해야 하오리까!"
주 나를 박대(외면)하시면 나는 어디에 서야 합니까.
그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이 들려온다.
"그래, 내가 안다. 그래서 널 위해 다른 길, 너의 노력이 아니라 내가 선물로 주는 길을 예비해 놓았단다. 그것을 믿어라."
기억하십시오.
율법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로 인한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롬 6: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죄를 깨닫게 되고 비참함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예비하고 계셨는지,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 우리에게 그 죗값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단번에 처리할 어린양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웠던지 바울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러나"라고 역접부사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 이제는 하나님의 종(노예)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에 종이 아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이미 얻었지 않았는가.
우리는 마침내 영생을 얻는 것이다.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율법의 공의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율법이 아닌 또 다른 길로 주신) 하나님의 은사[선물로 주시는 구원]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오, 나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진리, 그 비밀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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