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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준비론(신학)의 문제점과 비판, 그리고 올바른 이해

[明泉] 맑은 샘물 2023. 11. 2. 06:25

"두 교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 준비론’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200년 이내 (청교도들) 기간에 치열한 논쟁 과정과 [개혁주의] 신학의 목회적 체험 속에서 정돈되어, 그 후 지금까지 300여 년의 [개혁]교회들 속에서 견지된 교리들이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5631


청교도들이 사용한《준비》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준비시킨다"는 말은 회중교회의 조나단 애드워드나 퍼킨스와 청교도들이 주장한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다.
퍼킨스는 회중주의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상관 없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한다면 펠라기안이 된다.”

회심준비론이란?

청교도들이 사영했던 의미는 "하나님이 주권적 은혜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준비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회심준비론의 핵심은 ‘택한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것이다.
퍼킨스에게 "율법은 죄인이 은혜언약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 내 삶을 비추어 보니 나도 그 율법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퍼킨스가 말하는 준비론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까지이며,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은 은혜의 결과이다.
청교도들은 율법과 복음을 항상 같이 선포한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시대에는 16-17세기는 소명, 중생, 회심 개념의 구분이 없고 같이 사용하곤 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으로 16 - 17세기 신학을 재단하면 굉장한 오류가 나온다.
퍼킨스의 《준비 교리》가 중생 이후냐, 중생 이전이냐 이것이 중요하지 않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가 중요하다.
퍼킨스는 준비시키는 역사,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역사는 특별한 역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역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백성은 특별한 은혜까지 나아가지 못하지만,  택하신 백성은 필연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은혜’(Renewing Grace)로 연결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역사적 배경, 회심준비론의 탄생

교개혁 이후 청교도 시대가 펼쳐지던 영국의 종교적 상황(30년 전쟁)에서 이런 《회심준비론》이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 역시 청교도들이 건너가 교회를 세우면서 습관적 종교인들에게 회심을 촉구하면서 탄생했다.
• 1553 에드워드 사망/ 프로테스탄트적 개혁 중단
• 메리 여왕(1553-1558)에드워드 6세 치하의 법률이 폐기, 가톨릭정책으로 회귀, 많은 영국교회 목사가 교구로부터 추방(전체의 1/4), 국외 망명
치세 동안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으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탄압, (Bloody Mary, 피의 메리)
•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즉위 /영국 교회제도 확립,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타협을 시도. 영국의 독자적인 감독교회제도의 확립(수장령),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 및 서약, 서약 거부 성직자약 8천명의 중 약 7백여명이 성직지위를 상실. 1559년, 예배형식통일법 공포 => 성공회
영국 국교회 성도들에게 천주교의 습관들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을 모른채 습관적 (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영국 국교회는 생명이 없었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영국국교회 안에 교회 안에 진정으로 성경의 말씀을 따라서 회심된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형식적인 신앙인들이 많은 것을 탄식하며 청교도들이 그들을 깨우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 많이 세우기 위해 언약신학을 열심히 연구했다. 당시 언약신학은 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회심없는 회중들에게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첫째, 그러므로 ‘회심 준비론(doctrine of preparation for the conversion to God)’에 있어서 ‘준비(예비-인도)’에 대한 강점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준비시켜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 들이게 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준비’는 ‘성령께서 사람을 하나님께 회심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전에 그 회심을 위하여 그 사람을 내면적으로 준비,
또는 예비하게 하시는 은혜’에 강점을 두고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가 믿음을 갖게 하시기 전에, 성령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을 절박성을 인식하기 위한 예비적인 역사를 그 사람 속에서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회심케 하시는 성령의 준비적(예비적인) 은혜’는 죄와 허물로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 선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완전 무능을 전제한다. 그들은 스스로는 ‘죽어 있는 자’를 주권적 은혜로 각성하고 일깨시어 회심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주목하였다.

둘째, 그래서 청교도들은 진실로 중생, 또는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자는 사람마다 그 나타난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각성(conviction of sin)’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그 연장선에서 ‘구원에 대한 걱정과 열망’을 가진다고 보았다.

셋째, 그런데 그 ‘성령의 예비적인 준비’는 공중에서 하지 않으시고 않고 ‘그 사람 속에서 하신다.’ 그런데 그 사람의 회심을 위한 그 성령의 예비 사역을 하시는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어서 세부적인 국면에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넷째, 그러나 여기서 특히 주의하여 주목할 것은, 청교도 설교자들은 그런 것을 ‘도식으로 삼아 이런 준비를 하면 곧 회심에 이르게 된다’는 ‘준비주의’를 아주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3년 여 동안 목격하고 숙식도 함께한 가룟 유다도 회심에 이르지 못한 것 같이 ‘그런 준비에 참여한 자들’ 모두가 ‘회심에 반드시 이르게 된다’는 공식을 만드는 것을 아주 배격하였다. 곧 ‘회심 준비 + 은혜 = 회심’이라는 도식은 배격하였다.

다섯째,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비적인 은혜의 행사를 바라고 자신을 준비하는 것은 자신을 선하고 의롭게 만들어 회심하기에 좋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오직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은혜를 바라고 전인을 외적으로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애원하였듯이 말이다. 그의 애소는 예비적 은혜로 준비된 바디매오의 마음의 애소였다.
그래서 조엘 비키는 그의 ‘회심 준비론’의 책의 제목을 <은혜에 의하여 은혜를 위해 준비되는 :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식에 대한 청교도들의 발견>(Prepared by Grace, for Grace : The Puritans on God’s Ordinary Way of Leading Sinners to Christ)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회심 준비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참된 회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소산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여섯째, 어거스틴이나 칼빈도 회심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하면서도, 그 회심에 이르는 영적 과정이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목양적으로 대응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바로 그런 목사가 ‘청교도들이 말하는 회심(예비) 준비론’을 알든 모르든, ‘청교도들과 같이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회심예비(준비)론’의 관점대로 성경에 걸맞게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충실한 목사일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회심준비(예비)론’을 ‘회심을 위하여 자신을 준비하는 율법주의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복음의 은혜의 영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알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방식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종의 교리’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회심준비(예비)론의 관점을 가진 청교도 설교자들은 신약에 나타난 사도의 본을 중시하여 ‘율법주의’와 ‘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를 다 배격하였다.
아울러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각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기를” 힘썼고(고후 11:2),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세우는 일”에 매진하였다(골 1:25-29).
그래서 윌리암 쉐드(William Shedd, 1820 - 1894)는 그의 저작,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에게 하는 설교들 - 사망의 잠 깨워 거듭나게 하는 말씀>(The Sermons to the Natural Man)에서 ‘회심 준비론적’ 관점에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죄인들의 가공할 실상’을 제시하며 복음 신앙의 절박성을 호소한다.

칼빈은  “스스로를 정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됨이 없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저주에 대한 두려움과 극심한 고통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회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Leroy Nixon 번역 (Audubon, N.J.: Old Paths Publications, 1997), 54.]
칼빈의 신명기 강해에서는 이렇게 준비론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올바로 인도해 주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뚜렷이 다른 두 가지 은혜를 수여하신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준비되어 그분께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은혜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깨우치셔서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즉시 그분을 섬기는 지속적인 애정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은혜이다....
인간이 믿음으로 이끌려오기 전에...
그들은 미리 어떤 적절한 준비를 하게 된다
.... 그들은 믿음은 없지만 믿음으로 가는 입구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적 움직임이 인간으로부터,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분께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가르치셔서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여하신 하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행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Calvin, Sermons on Deuteronomy, 422.]
이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준비(예비)적 은혜》는 믿음으로 가는 길로 인도해 준다는 것과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에도 회심하지 않은 (종교인으로 습관적인 신앙생활하는) 자들에게 회심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포털뉴스 참조
https://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05


2022년 총회는 분명하게 “회심 준비론(준비교리)은 개혁신학이 아니고, 개혁신학과 상반”(제107회 총회 보고서 p. 410)된다고 결의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는 마치 설교자나 개인이 회심을 위해 율법적 요구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회심하도록 예비하시며 회심에로 이끄시는 은혜를 믿는다.
이 때에 하나님은 율법을 사용하시어 비참함을 깨닫게 하심으로 회심에로 이끄심을 믿는다.
영국의 청교도 시대는 헨리8세와 국왕(개신교), 메리여왕(로마카톨릭/피의 여왕으로 불림), 여왕 엘리자베드1세(수장령-성공회)를 거치는 동안 내부적으로 개혁신앙을 지키는 자들은 온갖 핍박과 박해의 시기에 가짜 신자가 양산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모른채 문자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인본주의적인 회심 준비론을 말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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