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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자의 선행을 통한 의와 신앙을 통한 의가 어떻게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가?

[明泉] 맑은 샘물 2023. 9. 23. 17:00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통해 얻는 의와 신앙 곧 믿음으로 얻는 의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불신자로 지내던 자들을 복음을 통해 성령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에로 소명(부르심)하신다.

유효한 부르심을 받은 신자는 그의 영적 각성을 통해 죄를 통회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신자 안에 성령께서 중생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물같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3장에 중생에 대해 살펴보기 바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이미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함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며,

성령께서 그들 안에 영적 각성을 통해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소망하도록 역사하신다. 

이 때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중생하는 역사를 말한다. 

택함받은 신자 안에서 무의식 가운데 중생 - 물과 성령으로 - 하게 하신다. 

성령의 물같은 작용으로 그 일을 하신다. 

이를 헨디아디스 'hendiadys'(one through two)라 한다. 

  우리사전에는* 중언법, 두 말 한 뜻. 유사한 말이나 중첩되는 말을 연속 사용함으로써 강조하는 기법을 말한다.

 말의 흐름에 율동을 주어 사용하기에 편리한 장점도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자주 선지자나 시적 표현에 흔하게 쓰였고,

 희랍어 번역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표현법이 되었다.

 고전 기록을 보면 ‘Lord and master’ 같은 어구가 당시에는 중언법으로 쓰이다가 나중에 ‘lord’하나로 줄었다.

고대 어구인 ‘arise and go’나 현대 영어의 ‘get going’ 모두 강조법이다.

약성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나온 ‘whatever you pray and ask’를 보면 ‘pray and ask’가 별개의 두 가지가 아니라

‘ask in prayer’로 정리되는 강조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Come and go’(왕래하다)처럼 ‘A+B’ 구조가 두 가지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A+B’가 하나의 의미가 되는 중첩어의 반복이나 중언법의 시도라면 이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Try and run’과 ‘Try to run’은 상호 다른 문장이고,

전자는 의미 형성이 되지 못하는 반면 후자는 ‘달려 보라’는 뜻의 올바른 문장이 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6262066880240

성령의 물같은 작용(역사, 일하심)을 의미한다.

딛3:5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4 우리 구주(救主)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사람 사랑하심을 타나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救援)하시되 우리의 행(行)한바 의(義)로운 행위(行爲)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矜恤)하심을 좇아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령(聖靈)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豊盛)히 부어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恩惠)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永生)의 소망(所望)을 따라 후사(後嗣)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물이 가진 특성>이다.

첫째는 생수이다. 모든 생물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둘째는 모든 더러운 것을 씻는 일을 한다.

이같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되살리고 씻는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을 통해 얻는 의는 "의롭다함"을 얻는 칭의이다. 

 

이 칭의는 우리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 

이같이 칭의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받은 자녀로서 선행은 무엇인가?

"구원받은 자녀가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선행은 무엇인가? 

신자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 자격을 얻게하는 것이다.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녀들이 얻게 될 <상급>이다.  


19. 선행을 통한 의와 신앙을 통한 의가 어떻게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가?

순결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행들(우리가 방금 기술한 바)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의를 인식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실 수밖에 없고
그것을 상 주실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으로 칭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그와 같은 선행을 헛되이 과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존전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의에 상응하는 것 이외에 행위를 통한 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선행을 통해서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자) 어떤 선행들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선 사람들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순종으로부터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선행이 결코 이 성도들을 의롭게 할 만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다.
비록 이 사실이 이해되기 어려울지 모르나 우리에게서 나오는 행위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하며, 우리의 어떤 선행이라도 약간은 오염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죄인이요 죄의 잔재를 늘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 밖에 있는 그 무엇에 의하여 칭의를 받아야 한다.
즉,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이 우리의 불완전성을 가려야 하고,
그의 순결이 우리의 불결을 씻어야 하고,
그의 순종이 우리의 죄악을 도말해야 하고,
결국 그의 의가 값없이 우리의 의로 여겨져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행동을 우리는 전혀 행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존전에 설 때 우리의 행동들을 오염시킬 죄악들이 이처럼 은폐 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들을 보실 때 전적인 순결과 거룩함을 보실따름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행동들을 의롭게 보시며 후한 상을 약속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들을 크게 칭찬하신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게 됨으로써 값없이 의롭다고 용납되면,

또한 우리의 행동들까지도 의롭게 여겨지며, 끝으로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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