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진정한 역사가 되려면
기록된 역사와 해석된 역사
歷史(지날 력/역, 사기 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事件, Incident) 혹은 사고(事故, Accident) 그 자체, 즉 사실(事實, historical fact)을 말한다.
사건이란 그 일이 사회적으로 관심이나 주목을 끌만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역사는 시간적으로 보면 이미 흘러간 과거에 속한다. 지난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을 한 곳에 모으면 하나의 역사가 된다. 이러한 《아직 해석되지 아니한 원석과 같은 상태의 사건 기록》을 일컬어 순수 역사라 하는데, 독일어로 '히스토리에(Historie)'라 한다. 반면에 그 사건이나 사고에 대해 해석이 가미되어 《의미가 부여된 역사》를 게쉬크테(Geschichte)라 한다.
독일어로 'Geschichte'는 '일어나다', '발생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geschehen'에서 유래했다. '일어난 일(to happen)', '발생한 사건'을 뜻한다.
그 발생한 사건에 관한 지식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Geschichte라 한다.

우리 개개인의 삶도 역사이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써왔다. 하지만, 글로 남겨지지 않는다면 역사일 수 없고, 기록으로 남겨졌어도 그에 대한 해석에 따라 그 사건의 의미는 달라진다.
우리는 날마다 역사를 써가고 있다.
개인의 일기장에 나의 역사를 기록해 간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수많은 사건들, 기업, 학교, 사회단체, 국가적으로도 수많은 일들이 신문이나 매스컴을 통해 역사가 알려진다.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동일한 사건을 놓고도 《객관적인 역사》와 《주관적인 역사》로 나뉜다.
어떤 해석이든 거기에는 해석자의 관점이 들어간다.
그래서 역사는 해석의 역사이다.
역사는 그 역사를 기록한 작가의 시점에 따라서도 다른 관점이 개입된다.
또 해석가에 따라서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해석자에 따라 다르고, 교훈도 다르다.
예를 들면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를 들어 보자.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목회자들이 헌신을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하고 언급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연보[헌금(헌물)]를 드린다.
여러분은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해석에 따라 적용도 다르다.
역사적 맥락이 중요하다.
《관찰 - 해석 - 적용》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렇다. (눅 21:1~6)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부자들)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이야기는 실제 성전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본문은 어려운 형편에도 헌금을 바치는 과부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인가?
아니면 당시 종교적인 착취를 당하는 과부에 대한 탄식인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해 분노하셨다(막 11:17; 마 21:13; 누구 17:46). 그리고 성전에서 소란행위를 통해 헤롯에 의해 지어진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준다(눅 19:46; 마 21:12~13; 막 11:15~18; 요 2:13~16).
당시 헤롯(대제)이 지었던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어도 마무리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공사였다.
요한복음 2장 19~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예루살렘 성전은 그 화려함도 대단했다.
누가 이렇게 지으라고 했던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니다.
이 성전은 누가 짓고 있는가?
헤롯인가? 그는 정치적인 계산으로 짓고 있었다.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헤롯성전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헤롯성전을 짓는 데는 백성의 고혈에 의해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무너져야 한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헤롯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 아니었다. 해롯에게는 정치적 안정을 주고, 종교지도자들의 배를 불려주기에 안성맞춤인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
성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그들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도둑질, 종교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강도짓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로 이 성전은 무너져야 했다.
역사적으로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은 AD 70년, 훗날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는 티투스 장군과 로마군대였다.
과연 성전이 무너진 것은 단순히 로마의 침략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문의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백성들에게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착취했던가?
성전이 아니었다. 버젓이 착취를 일삼는 종교지도자들, 그 강도의 소굴》을 무너뜨린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해도 강도의 소굴이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는 성전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껍데기뿐이요, 돌로 쌓은 바벨탑일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무너지고, 강도들이 심판받은 것뿐이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로 성전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말하면 《성전은 무너진 것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 과부에 대해 살펴보자.
과부가 신앙이 좋아서 생활비 전부를 드렸을까?
아니면 무언가 감언이설로 이 과부가 바칠 수밖에 없는 헌신을 강요당한 것일까?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을 나무라지 않으신다.
그녀가 바친 헌물은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 그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생활비까지 착취당하는 과부를 보시며 예수님은 탄식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