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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완전한 진리이다.

[明泉] 맑은 샘물 2023. 8. 27. 09:36

계몽주의의 우상을 넘어서라.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것

낸시 피어시는 성경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쓴 그의 저서인 "완전한 진리"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블래마이어즈의 저서 인용)'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기독교 지성이 없음을 한탄한다. 지식이 없는 지성이 아니라 한쪽으로만 치우쳐 이 세속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고, 올바른 사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속주의에 끌려가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처럼 탁월한 변증으로 세속주의 물결을 막아낼 지성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성경학교 중퇴자들이 아닌가? 성경적 세계관과 기독교 철학으로 충분히 탐구하고 논증하고 변증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기독교 신앙과 영적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결국 우리와 이 세상을 변혁시킬 하나님의 능력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끔찍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 안에서 마저 분열된 채 온전하고 통합된 삶의 기쁨을 박탈당하고, 세속주의 사상의 노예가 될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합리적 이성의 토대 위에 세워진 계몽주의의 우상은 사람들의 지성 위에 군림하며 세상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계몽주의 우상을 뛰어넘는 변증


세속주의자는 자신의 이론이 어떤 특정한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런 분열된 의식구조를 더욱 강화시킨다. 달리 말하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종교적 견해는 편향되거나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비난하는 반면, 자신의 견해는 공적 영역에 적합한 합리적이고 편견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책략이 종종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해 신앙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그들이 보다 넓은 문화의 영역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마치 어떤 종교적·철학적 가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중립적인 또는 편견이 없는 이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물론 우리는 거룩한 영역에는 각기 다른 종교적 견해 - 기독교 · 유대교·이슬람교 · 뉴에이지 등 - 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세속적 영역에 대해서는 종교적·철학적 가치관이 개입하지 않은 중립적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이상 자체가 특정한 철학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이성" 이란 적나라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전의 모든 가정과 종교적 신념의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에서 온 것이다.
이는 17세기에 흔히 최초의 근대적 철학자로 꼽히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표명되었다.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우리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토대에 도달하기까지 의심 가능한 모든 것을 생각에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아주 깊이 파고 들어간 끝에 유명한 코기토(라틴어: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토대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생각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주체의 존재인 셈이다.
체계적인 의심의 방법으로 인간의 정신 또는 이성 (종종 대문자로 시작하는 이성(Reason])이 신과 같은 객관성과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 어느 철학강의에서 담당교수가, 객관성을 하나님이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정의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이자 모든 것의 실상을 알고 있는 존재만이 참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이야말로 그런 초월적 힘이며, 정확무오한 지식을 제공한다고 과신했던 것이다.
결국 이성은 절대적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우상에 다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데카르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논박 불가능한 코기토의 논리를 계시했다고 확신한 나머지 이탈리아에 있는 로레토 성지로 순례의 길을 가겠다고 서약했다. 그리고 수년 뒤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을 유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본보기인 셈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단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정확 무오하고 자율적인 진리의 근원으로 보는 《합리주의》의 기틀을 정립한 장본인이다.
이성은 어떤 종교나 철학으로부터도 독립된
진리의 창고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계몽주의의 발흥

이러한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계몽주의》 사고가 세상에서 꽃을 피우게 만든 장본인은 기독교 진리를 진부한 것으로 만든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문제가 있ㅇ었다.
선배 종교개혁자들이 확립한 교리만을 앵무새처럼 반복만 할 뿐 세속의 사상을 간파하고, 그들에게 기독교에 더 탁월한 진리가 있음을 변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목회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는지 아는가.
분명한 사실은 당시 "기독교 설교가 내가 진리를 말하니 무조건 따라오라. 덮어놓고 믿어라."식으로 변질되었다.
이를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이 마치 "노예적 복종"을 강조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지금도 이러한 부류의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톨릭의 음모

르네상스를 통해 교회는 종교개혁, 옛 신앙(본래의 성경적 신앙)을 회복하는 개혁교회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가톨릭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은 은밀하게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를 서서히 실행하고 있었다. 사실 맹목적인 종교는 카톨릭이다. 그들이 교리의 종교를 변질시켰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처럼 기독교를 이방종교처럼 <우상화>시키고, 제2계명을 없애고 10계명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우상화(상모 마리아)와 7성례를 통해 인간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요람에서 무덤까지) 카톨릭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에 맹목적 복종의 신앙을 강조했던 가톨릭임에도 가톨릭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슬쩍 벗어나 비켜나 있었다. 그리고는 가톨릭을 반대하고 분리한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이성주의자들을 훈련시켜 기독교 사상을 무너뜨릴 음모를 계획한다.
이 무모하고 엄청난 계략은 성공을 거둔다.
계몽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주의자들이고 철학을 논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가톨릭의 전위들이다.
그들은 지금도 전 세계로 퍼져 나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일에 은밀하게 위대하게 침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지성적 신학과 철학

초대교회나 그 이전이나 참된 성경적 신앙은 세상에는 소망과 위로요 피난처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최고의 지성으로 세속주의에 경종을 울렸고, 대안을 제시해 왔다. 그 첫번째 인물이 속사도들과 교부들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그리고 제롬,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종교개혁자들, 청교도들, 그리고 그 후예들은 철학적 지성의 소유자들이었다.
최근에 이러한 일에 앞장선 선구자가 라브리 창시자인 '프란시스 쉐퍼'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를 통해 하나님이 세속주의와 계몽주의를 어떻게 반격하게 하시고 승리하시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학의 문제점

오늘날 신학의 문제점은 단 하나이다. 진리에 대한 깊이와 무게감이 전혀 없다.
한 마디로 신학과 설교의《가벼움》이다.
피상적인 신학으로는 참되고 풍성하며 샘솟는 진리를 맛보게 만들어줄 수가 없다. 이성과 합리주의로 뭉친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그들이 볼 때에 신학은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들의 귀에 설교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다.
이제 다시금 사도바울에게로 예수님에게로 다 가까이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바라보는 그분들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논증하고 변증하며, 이 시대를 승리로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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