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대한 변증

[明泉] 맑은 샘물 2023. 8. 25. 17:26

니체,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인들에게서는 혹평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에게서는 호평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은 극으로 갈릴 때가 많다.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현재에는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니체의 사상은 그 전복적 성향으로 인해 자주 오해되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니체의 성향은 온갖 권위에 불복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성 비방과 음해에 시달렸으나, 사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는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등과 함께 근대철학을 전복시킨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니체는 가끔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시초라고 불린다

니체는 당시 철학자들 가운데 이단아로 불렸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Gott ist tot!        신은 죽었다.
Gott bleibt tot! 신은 죽어있다.
Und wir haben ihn getötet!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Wie trösten wir uns, die Mörder aller Mörder?
살해자 중의 살해자,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위로할 것인가?
- 니체의《즐거운 학문(1882)》에서 -

사실 이 표현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니체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가 "신은 죽었다. 우리가 죽였다"라고 말한다고 정말 신이 죽는가?
간단하다.
그 당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대이다. 그 당시는 중세신학을 비판하고 신을 버려애 지성인으로 인정받던 시대였다.
중세적 전통의 신학을 버리고,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그 당시의 지성들은 인간의 《이성》이 그들의 우상이 되었다.
인간이 신관념조차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지워버리거나 부정하는데 앞투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고, 신을 따를 수도 있고,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는 자유를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신에 대하여 강력히 부정한다고 해서 신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면 밤에 일어나고 낮에 자고, 또는 동굴에 살면서 밖으로 한번도 나오지 아니하는 사람이 나는 태양을 모른다고 했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들은 애송이 같은 어린아이의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Gott ist tot!       신은 죽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서 죽은 존재라고 치부한 것이다.
Gott bleibt tot! 신은 죽어있다.
인간이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신도 인간에게 '나 좀 알아달라'고 구걸하거나 강제적으로나 강요하며 억압하지 않는다.
Und wir haben ihn getötet!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인간이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신에 대해서  찾거나 의존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결국 이렇게 그가 아무리 외쳐도 그 사람 안에서만 신존재 관념이나 신의식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나서 한 것은 무엇인가?
신의 관념을 버렸다고 신에게서 벗어난 것일까?
인간애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런척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행동과도 같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질로 만든 금송아지 형상'으로 대체했을 뿐이다.(출 32:1-6)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시내산에서 긴 시간 '내려오지 않았을 때 백성은 조급하고 불안한 나머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을 협박한다.
아론은 그들을 막아설 용기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였다.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이다.
금송아지가 만들어지자 백성은 이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 부르며 그 앞에서 기뻐 날뛴다.
그들이 애굽에서, 홍해와 광야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보았어도 이같은 어리석은 짓을 벌인 것이다. 금송아지 따위로 하나님을 축소시키고 자신들이 만든 신으로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드러거나 찾아내거나 한 것을 대단한 것인양 법석을 떤다. 겨우 한 짓이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만든 금송아지(초인, 영원회귀)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세 신학이 르네상스 이후에 사회적 변화에 대해 대안을 말해 주지 못했다. 그러자 고대 문헌들(르네상스-문예부흥)을 읽으며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조바심에 빠진 인간은 인간 스스로 신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이 찾게 된 다른 대체재는 인간 안에서《이성》이었다.
그들이 신봉하는 신은 곧 자신의 이성의 산물인 학문을 통해 만들어진 신일뿐이다.
그것이 옳은 《절대 선》이라고 주장하지만, 검증할 방법이 없다.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적용하는 것이 다르다.
다양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스스로 절대선이 아니라는 방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랴서 그들은 절대 선은 없다. 각자가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주도저긴 삶을 사는  초인이 되어 현세의 고난을 극복해 나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운명을 사랑하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한다.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사실 인간은 신을 무시하고, 무관심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도 절대자이신 신을 버렸기 때문에, 그 신을 대신할 대용품을 찾아 자기가 신봉하는 신념, 확신을 믿다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합리적 이성)는 그들의 신념이나 확신을 자신의 정신세계에 구축하고, 끊임없이 세뇌시켜 자신이 옳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것 또한 보편적인 진리는 아니다. 자기 확신이며, 자기 신념이다.
결국 인본주의는 《자기 확신, 자기 신념》을 신으로 섬기다가 죽은 것이다.
사도 바울같은 대학자가 당대의 이집트, 바벨론, 그리스, 로마의 학문을 모를리 없다. 그는 헬레니즘의 인본주의적 사고인 이성으로 세워진 로마를 보면서 무슨 말을 했는가?
당대의 최고의 학문이 집결되어 있는 로마를 향해, 《인본주의 최고봉》을 향해 이같이 선언한다.
로마서 1장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 얼마나 완벽한 반박이며 변증인가.
결국 니체는 그의 말처럼 자기 스스로가 인간의 시유에서 하나님을 없애고, 인본주의 세우려 살해자 중의 살해자가 되었다.
또한 그가 만든 학문은 또 다른 사람의 영혼과 삶을 베는 칼이 되어 살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어찌 알리요.
그 진실은 종말에 심판대에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자신이 버린 하나님이 없는 자신의 마음의 텅 빈 공허감을, 거기에 채울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는 것을.
어디서라도 위로받고 싶어서, 미친 듯이....
Wie trösten wir uns, die Mörder aller Mörder?
살해자 중의 살해자,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위로할 것인가?
니체, 그의 가르침은 결국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이성의 빛을 가지고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맹인에게 빛"을 비춘다고 여길 뿐이다.
결국 자신의 잘못된 학문으로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일을 했다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렇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토록 혐오하고 멀리하던 하나님의 심판을 어찌 피하려는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