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진정한 죽음이다
사람마다 누구나 죽음을 싫어한다.
그래서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아리비아숫자 4를 대입하여 엘리베터나 병실, 호실 등에도 [ 4 ]가 들어가지 않도록 피하거나 " F "로 표기해 놓는다.
그런다고 덜 죽고 안 죽는가?
『설문해자』에 따르면 사(死)는
첫번째로 “다하는 것이다 [시澌].”라고 하였다. 시진(澌盡 : 기운이 빠져 없어지는 것)의 의미로 풀이한다. 죽음은 육신의 생명의 기운이 다하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창 49장 33절,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이처럼 육신의 죽음으로 세상에서의 삶은 끝을 맺는다. 삶의 끝이지, 영靈의 끝은 아니다. 『설문해자』에서는 또 死를 “사람이 떠나는 것이다.”라고도 풀이한다.
하루는 예수님이 한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 이에게 “나를 쫓으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했다(눅 9:59).
이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셨다(눅 9:60).
마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마 8:18~22).
장례 이야기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
젊은이는 지금 갑작스럽게 부친상을 당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이 젊은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권유를 받았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길에서 ‘나를 쫓으라’라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젊은이는 부친의 장례가 걱정이 되었다.
우리로 하면 제2차 장례(탈상)를 마친 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유대인의 장례법
유대인들은 장례가 발생하면 당일에 장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신 21:23, 행 5:6). 만일 장사를 늦추면 시체에서 악취가 나므로 향품이나 향유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의 풍습이므로 피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장례 때에 곧바로 시신에 향품이 사용된 일(눅 24:1, 요 19:40)과 마리아가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미리 부은 사건(요 12:7)은 예수님을 왕으로 아주 특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라는 요한은 표현하고 있다.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다’라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다.
하스모니안 왕가(BC 1세기 초~ AD 2세기말)는 사람이 죽은 당일에 시신을 가족 무덤인 동굴 속에 안치하였다가 1년 지난 후에 뼈만 추려 유골함(조상들의 뼈가 있는 곳에 함께 안치함)에 넣는 제2차 장례(ossilegium)를 치렀다(예루살렘 탈무드 Moed Qatan 1:5).
가족들은 7일 동안 애도기간을 가졌고, 30일 동안 추도기간(shloshim)을 지낸 후 1년을 기다려 2차 장례를 지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라고 하신 말씀은 이 젊은이는 아직 부친의 제2차 장례가 남아 있어 이를 걱정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2차 장례까지 아직 몇 달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전도여행을 다녀오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에 왜 그리 집착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무덤들을 보면 1년 동안 시체를 안치할 수 있는 중앙홀이 있고 그곳에 네모난 직사각형의 큰 돌이 있어 거기에 시신을 올려놓고 시신이 잘 잘 부패하여도록 한다. 1년 정도 지나면 뼈만 남는데 이를 추려 안쪽에 좁고 긴 굴들(보통 2~5개) 뼈를 넣게 된다. 부유층들은 유골함을 얻을 수 있는 선반이나 별도의 방을 갖춘 곳도 있었다.
이러한 장례는 오랜 관습으로 이미 야곱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 49장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죽음에 대한 이해
死 = 歹: 앙상한 뼈 알 + 匕: 통곡하는 사람 모양
슬픔과 곡은 한 번이 아니었다. 육체의 죽음이 끝이지만, 그러나 장례의 끝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제2차 장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일차적인 죽음(사망)은 육신의 종말이어도 그 영혼은 끝이 아니다.
그래서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장례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으로 끝이다. 부활이 있으니 어떻게 죽든, 어떻게 장례가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
죽을 사(死) = 앙상한 뼈[歺=歹, 앙상한 뼈 알] 앞에서 + 사람[人=匕]이 꿇어앉아 애도를 표하고 있는 모습이다.
죽음은 곧 흙으로 지음 받은 육신이 진토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로 우리 영이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8절).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19절).
사람이 죽고, 짐승도 죽는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짐승이 죽듯이 사람도 죽는다.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그렇다. 짐승도 흙으로 돌아가고, 사람도 흙으로 돌아가니 대단한 척 교만들 떨지 말라는 것이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20절).
전도서 저자는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상식을 먼저 말한다. 이치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서 또한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는 논법을 쓰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기를, 사람의 혼은 위 곧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지 그것을 누가 알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인생의 결말은 우리에게 있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인생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앞에 겸손하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1절).
여기서 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영》이다.
이것이 인생의 결론이다. 명심하라 말한다.
우리가 아 세상애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이 위로 올라갈지 말지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 즉 그에게로 돌아가기 전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가 너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주권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욥기 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무도 이 세상의 것을 가져갈 자 없다.
또 하나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 취하여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불청객이다. 누구에게, 언제, 어느 시에 임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대비하라. 준비하라.
전도서 12:7 "흙(육신)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살자.

https://youtu.be/yknNtQ4Sim8?si=mibU4qCj1dN5_T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