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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머리와 속알머리

[明泉] 맑은 샘물 2023. 8. 6. 22:57

사람마다 다 다르다.

사람마다 기질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행동하는 방식도 다 다르다. 정치가 기질의 사람, 장사꾼 기질의 사람, 농사일에 재능 있는 사람, 예술가 기질의 사람, 운동을 잘하는 사람 등...
그런데 부모는 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좀 편하게 배부르게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되지도 않는 것을 익지로 시키고나 재주가 없는데도 윽박지른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고, 우직한 사람이 있고, 기계치가 있고, 젊어도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욕을 하기 전에

상황 파악을 잘 못하는 사람, 융통성이 좀 부족한 사람, 남들 보고도 못 따라 하는 사람 몸치도 있다.
그러면서 잘 못하면 그 하나 때문에 싸잡아 욕을 한다.
"아니 그래, 그것도 못하냐"
어떤 일은 잘 하지만, 어떤 일은 잘 못한다.
바꾸어서 그 사람이 잘하는 것을 누구나 잘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 시킨 사람의 기준이다. 그도 언젠가 어떤 부분에서는 잔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또 어떤 부분은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을 것이다.

생각 좀 하고 말하자.

듣는 사람은 마음에 상처가 되나니, 말을 가려서 하자. 그도 집에서는 귀한 자식이고, 가장이고, 남편일 수 있고, 아빠일 수 있다.
단지 내가 잘한다고 사람을 비하하지는 말자.
말하는 사람도 겨우 그 정도 수준 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자기도 윗사람에게 분명 엄청난 욕을 먹어서 사표 쓰고 싶은 때가 많을 테니까.
"아니 그래, 이것도 못해"라고.
그러므로 말을 지혜롭게 하자. 말만 잘해도 천냥 빚도 갚는다 하지 않았던가.
생각하면서 마구 떠오르는 대로 말하지 말자. 자기는 말을 마구 하지만 뒤끝이 없단다. 그런 말은 개나 주자. 개는 때리고 바로 먹을 것을 주면 방금 맞았던 것을 기억지도 못하는 동물이다.

말을 가려서 하자.

적으로 만들지 말고 친구로 만들자.
분명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 되고, 응원군이 될 테니까.
종종 '소갈머리가 없다'는 말들을 한다.
뜻이나 알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속알머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소갈머리이다. 소갈머리는 '소갈'과 '머리'의 합성어이다.
하지만 '소갈머리'나 '주변머리'는 '머리(머리카락)'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다.
현재 우리말에서 '속알'이란 말은 쓰임새기 없다. 또한 '속알머리'라는 말도 없다.
소갈머리는 '염치가 없거나 생각과 사려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자어로 '소견(所見)은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을 말한다.
'소견'이 낮을 때 즉, 문제의 핵심을 못 찾을 때  하는 말이 '소견머리'없다고 한다.
'소갈머리'는 '마음이나 속생각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또는 '마음보를 낮잡아하는 말'이다.
"그 자식은 도대체가 소갈머리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 녀석은 말하는 것도 고약하지만, 소갈머리도 애초에 글러 먹었어"라는 식으로 함부로 인성과 인격의 비하하는 말을 한다.

'주변머리가 없다'는 뜻은 변통하는 재주나 융통성이 없어 일을 답답하게 처리할 때 쓰입니다
인정머리, 소갈머리, 주변머리는 부정적인 말로써 대부분 ~없다와 함께 쓰입니다. 예를 들면 인정머리가 없다는 부장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밴댕이 소갈머리 같기는, 걸핏하면 토라지고 계집애 같이 삐진다니까 …"처럼 쓰인다.
이때 '머리'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쓰이면 말 그대로 머리를 나타내지만,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쓰이면 비하의 뜻이 된다.
'싹수머리, 안달머리, 인정머리, 주변머리, 주책머리, 버르장머리, 얌치머리, 체신머리, 얌통머리'  등으로 접미사 역할을 한다.
소갈머리는 소갈딱지라고도 한다. 여기서 '-딱지'도 '-머리'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주변머리'는 '주변(상황)'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때의 '주변'은 '(환경이나) 일을 주선하거나 변통함. 또는 그런 재주'를 말한다.
그 사람은 '참 주변이 없어, 그는 주변이 좋아' 등으로 쓰인다.
한자어로  어떤 대상의 둘레를 뜻하는 주변(周邊)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다. 어떤 것은 한자로 표현이 되지만, 우리가 평소 쓰는 말과 전혀 다르다. 즉, 순수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비하하고 인격이나 인성을 무시하는 표현은 말하지 말자.
더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 (잠 10:11 잠 15:2,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칼은 몸을 벨 수 있다. 하지만 말은 날카로운 날이 없어도 너무나도 날카롭고 뾰족하여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또 그 상처가 너무 깊어 어떤 이로 하여금 좌절하게 하고 넘어지게 만든다.
부모가 자식을 노엽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3)
오늘날 적잖은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아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부모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어른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자식이었을 때가 있었고, 아랫사람이었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말로다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정말, 살맛을 잃어버렸을 때도 있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그러기에 말로 자녀나 아랫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그들은 분노한다. 그것이 반복되면 분노저절 장애까지 간다. 당장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어서 안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마치 자신의 실수인 것처럼,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잘해 보자"라고 하여 상처를 안 입히는 것이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이다.
훗날 그들이 나를 존경하고, 효도할 테니까!
말은 힘이 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더욱이 부모나 선생님들이 하는 말은 자녀들에게 한평생 두고두고 변화를 가져온다.
인생을 비꾸어 놓는 다는 것을 기억하자.

참 잘했어요. 앞으로 대단한 건축가가 되겠는걸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하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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