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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장,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明泉] 맑은 샘물 2023. 7. 24. 21:54

열넷, '14'라는 숫자와 다윗의 관계

히브리민족은 숫자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무엇으로 숫자를 대신했을까? 

그들은 그들의 언어 히브리어 <알파벳을 숫자>로 사용했습니다.

게마트리아라고 하는데,

숫자를 가지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우리 먼저 글에서 다윗이라는 이름이 숫자로는 14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열넷을 세번 반복하므로써 42이라는 숫자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총 42번 이동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여 유대인이 고대하던 구원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임마누엘하신 메시아임을 천명합니다. 

 

게마트리아, 숫자의 비밀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게마트리아는 신비롭고, 또 연결해보면 의미있는 암호였습니다.

예를들면 다니엘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에서 처음 나오는 표현이지만(단 7:25, 12:7), 

3년 반을 가리키는 기간이다. 사실 한 때라고 하면 어떤 기간을 의미합니다. 

"일천이 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 12:6)

"한때와 두때와 반때를 양육받으매..."(계 12:14)

다니엘은 다니엘서를 기록할 때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람어로 기록된 성경(다니엘 2:4-7:28 외. 에스라 4:8-6:18, 7:12-26)

왜 히브리어로 성경을 기록하다가 갑자기 아람어를 사용했을까?

아람어로 쓰인 구절은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때와 두 때와 반때를 지내리라(단 7:25)"입니다. 

단 12:7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한때와 두때와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하리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인봉 할 것이니라. 

다니엘 12:7에 나오는 "절반" 이란 단어는 단 9:27에 나오는 "이레의 절반" 이란 표현에 나오는 "절반"과 같은 단어이다.

단 9:27  "절반" 이란 표현은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레의 절반 " = 일주일의 가운데 => 수요일

단 12:7 " 절반" = 절기들 중 가운데 절기 => 나팔절

그들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계획을 전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를 쓰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팔레스틴)에 정착하고 나서 히브리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시대적 배경 보면 아람어는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지역에서 사용하던 언어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그곳에서 아람어를 사용합니다.

에스라 가운데 아람어로 된 부분은 페르시아 왕과 주고받은 편지 중에는

민중은 이해할 수 없었다(열왕기하 18:26)고 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종교적인 문서의 언어로 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은 생활언어는 헬라(그리스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헬라어가 국제 공용어가 되면서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포로귀환으로 돌아왔음에도 그들은 익숙한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지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그리스어와 병행하여 아람어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달리다굼"(막 5:41) "에바다"(막 7:34) "아바"(막 14;36)

"엘로이 엘로이(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막 15:34),  '랍오니'(요 20:16) 등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생활언어로 아람어를 부득불 사용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며

예수님이 탄생했던 시기는 B.C 4년경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계시가 끊겼습니다.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던 것은 메시아입니다.

이두매(에돔) 족속의 헤롯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물론 로마제국 안에서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혼하고 대제사장 가문의 딸, 미리암 결혼을 했습니다.

이렇게 까지 노력하고 성전을 확장하며 많은 치적으로 환심을 사려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란이나 봉기를 들까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며 동방으로부터 박사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와서 예루살렘은 소동이 났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탄생하셨구나."

헤롯은 동방방삭들이 물었던 때를 기준으로 아이들(유아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태복음 2장이 바로 그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북부 갈릴리에서 가까운 나사렛에서 "예수"라 불리는 청년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행하는 기적에 모두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여 주길 기대합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를 부르며 환호하자

예루살렘 성이 소동을 합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가 그들의 바라던 메시아로 그들을 로마의 압제와 헤롯의 아들들의 통치로부터 자유를 되찾아 주고,

다윗처럼 독립된 나라로, 경제적 풍요를 가져와 주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당연히 다윗의 후손입니다.

장자로 이어지는 관습에 따라 왕이 됩니다.  

 

정치적 세력

당시 유대에는 4개의 부류로 정치적인 세력으로 있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제사장 계열의 사두개인들은 제사만을 담당했습니다.

성전(성전세와 헌금)과 제사(제물, 양을 매매)를 통해 나오는 수익이 만만치 않게 많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평민이면서 율법을 가르치던 자(랍비)들로 6천여 명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무리로 자리 매김라고 있었고,

열심당(독립운동)은 직접적으로 로마의 군대에 타격을 입히는 게릴라전을 벌이던 제3의철학으로 불렸습니다.

에세네파는 그리고 현세를 떠나서 남자들만의 무리로 생활하며 하나님의 고대하하던 집단입니다.

이 네 부류의 세력은 각각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였습니다.

결국 예수에게 잔뜩 기대하였지만, 그는 십자가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열망하고 실낱같은 기대마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소식은 더 예루살렘을 소통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메시아인가?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를 보내주시지 않았는가?

이것을 바르게 정리해 주는 것인 신약성경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어떤 메시아 인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이라며 어린아이조차 알 수 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족보>입니다.

족보는 유대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다윗을 가장 먼저 이름을 생각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두 번째로 떠올립니다.

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새(Jesse) : "주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신탁을 유대인의 왕의 머리이며,

그의 후손만이 영원히 왕으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하던 마태는 유대인들이 '다윗'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세상에서는 그들을 이방민족으로 부터 구원해 줄 그런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마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며 족보를 기록합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세계, 족보)라. (마태복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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