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예배이다.
말씀요약 『이렇게 예배하라』
요4:24,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禮拜)하는 자(者)가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할지니라.
개역한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인류의 역사는 예배(제사)로부터 출발한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자식들에게 제사를 가르쳤다.
제사는 범죄로 떠나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기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로 아담과 하와가 자식들에게 가르쳤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제사였다.
예배 곧 제사는 최고의 축복이요, 하나님이 범죄한 인류를 만나주시는 《생명의 길》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헌제자와 제물을 하나님은 열납하셨다.
헌제자(獻祭者 = '헌신(獻身)' 제사(祭祀), 제사드리는 사람(者)
제물이 아니라 헌제자의 중심을 보신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이다.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가장 핵심이 되는 구약의 말씀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배는 삶의 구심점이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이와같은 예배,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를 사모해야 하고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로운 자라" 인정하심은 아벨의 그 예배를 열납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
제물보다 헌제자를 찾으신다. 그들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를 기뻐한다.
그들은 예배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림(롬12:1)을 소원한다.
로마서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예배(禮拜),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 영과 진리로
우리말 성경은 개역한글, ‘신령 + 진리’를 따로 떼어서 각각 번역했다.
영어로는 in spirit and truth이다.
영과 진리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영의 진리로, 영적 진리로, 진리의 영으로'
“진리의 영으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
헬라어 접속사καί(카이=and)는 문법으로 hendiadys(헨다이어디스)이다.
헬라어 ἓν διὰ δυοῖν(헨, 디아, 듀오인)에서 온 것으로 직역하면 one through two이다.
카이(καί)로 연결하는 두 단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 둘로써 한 가지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문법으로 《중언법》이다.
중언법은 비유나 중첩되는 말을 연속으로 사용함으로써 강조하는 기법이다.
카이(καί) "and"가 hendiadys로 사용되면
'A가 B를 수식' 하거나, 혹은 'B가 A를 꾸며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언법으로 해석해야할 성경 구절의 예)
눅2:47,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슬기와 대답'="슬기로운 대답"에 경탄하였다."
요3:5, 일반해석은 "물과 성령으로"각각이지만, 중언법 해석은 ≪"물 같은 성령"≫이 된다.
물은 세례로 해석하면 씻는다는 의미이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지 않았고, 바울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중언법으로 해석하면 더 쉽게 이해된다.
마3:16,막1:10,눅3:22,요1:32 ‘성령이 비둘기 같이’ 등에서는 성령을 물, 또는 비둘기로 묘사한다.
"물 같은 성령으로"라는 말은 성령의 일하심이 물과 같음,
<물>은 생명을 살리고, 더러운 것을 제거하며 씻는 역할을 한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고, 또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 영의 진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뜻한다.
3. “영의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말씀(진리)은 분명 기록된 계시이다. 그러나 그 진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그 말씀도 살아있다. 살아계신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영으로만 알 수 있다. 계시의 말씀이 성경저자들을 통해 글자로 표기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지금도 살아있는 말씀이요, 생기를 불어 넣는《영의 말씀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되어 읽는 사람이 지식으로 접근하면 지식에 그친다.
성경을 기록했던 성경 저자들이 받았던 《그 감동으로, 그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받는 자가 지식의 말씀으로 받을 수도 있고, 영의 말씀으로 받을 수도 있다.
성령으로 영이 거듭난 자만이 이렇게 받을 수 있다.
또 더욱 영적 일수록 더 깊은 감동으로 말씀을 받게 된다.
예배자의 영적 상태에 말씀을 받을 때에도 따르다.

말씀을 받을 때에 진정으로 아멘한다면 그 말씀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삼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정신과 영혼이 주의 말씀으로 염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다"라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8: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시41:13)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 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 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요하다. (시72:19)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 지어다 아멘 아멘 (시89:52)
제 1권은 1~14:13(아멘 아멘), 제 2권은 42~72:19(아멘 아멘),
제 3권은 73~89:52(아멘 아멘), 제 4권 90~106:48(아멘 아멘),
제 5권 107~150:6(할렐루야)
그 예를 살펴보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가르친다.
아멘이다.
히브리어는 '요레'(3138 יורה )는 비(rain)이라는 단어이다. 하지만, 파생어로 교훈, 지시, 가르침 등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 진리에는 “교훈”, “지시함”, “가르침”이 있다.
진리의 말씀은 <‘교훈과 지시와 가르침’>을 받는다.
성경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첫 발을 내디딘다.
만일 아브라함을 가야할 길과 목적지인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면 어떠했을까?
가는 시간도 알고 있고, 가는 방법도 다 알고 있다면 가는 길은 아브라함이 결정했을 것이다.
만일 가는 길과 방법도 알고, 가야할 곳도 알고 갔다면
그곳을 향해 가면서도 머리속에는 온갖 잡념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는 길과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가야할 도착지, 장소(주소)도 일러주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갈 길을 모르지만, 약속하신 하나님만 믿고 가야만 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가야할 곳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
도리어 머르는 것이 그에게 보약이 되었다.
《한걸음 한걸음씩》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오직 하나에만 집중하고 가야 했다.
마치 별을 따라가던 동방박사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만을 바라면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의 한걸음 한걸음이 기도였고,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호흡이었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세겜 땅《모레》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창12:6).
거기서 그는 제일 먼저 한 일에 예배(제사)였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다(창12:7)고 약속을 확인해 주시고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신다.
어떤 성경은 창12:6 ‘모레 상수리나무 = 선생(교훈,가르침)의 나무’(theteacher’s terebinth)로 번역했다.
《'모레'》는 동사 יָרָה (야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야라는 "~을 던지다/ 화살을 쏘다"란 뜻인데,
이것이 <히필>의 꼴을 취하면 가르치다/가리키다란 뜻이 된다.
히필형이란, <사역 능동, 사역동사의 의미를 가진 능동태> 이다.
과녁을 맞추려고 화살을 쏘는 행위가 동사 יָרָה (야라)이며 "과녁을 적중시키도록 가르치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적중시키도록 가르쳐주셨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 계획을 따라 섭리하신다.
거기 모레 상수리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의 지명(地名), 장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호수아와 이슬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넌 후 요단에서 가져올 돌을 취하여 단을 쌓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곳을 '길갈'이라하셨다.
즉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이다.
길갈의 원뜻은 גלל(갈랄)에서 유래한 '굴리다. 굴려내다'
<길 : 굴러갔다 + 갈 : 똥> 똥(배설물)은 수치를 비유한다.
겔(gel), 굴린다는 히브리어 동사 갈-랄-(galal)]에서 온 말로, [공](ball)을 뜻한다.
이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신비로운 섭리가 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나가면 우리들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다시 마므레를 찾는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창18:1).
'마므레'(Mamre)라는 이름의 어원(語原)과 뜻은 모른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안에는 원래 없는 단어 일뿐 아니라, 성경 바깥에 있는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마므레(Mamre). 인명으로 쓰였는데, 아모리 족속으로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로 아브라함과 동맹하여'(창 14:13)로 소개한다.
창23: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앞으로도 아브라함이 "갈 길을 모르지만,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도록 지시해 주심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
헤브론은" 교제하다. 교통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소통하는 관계요, 교통하며 살았다.
훗날 이곳이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우라 삶에 헤브론처럼, 《하나님과 소통하라. 하나님과 온전히 사귀라, 하나님과 동행하라》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 영혼이 살고, 갈길을 깨닫게 된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은 모레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에게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 주셨다.
또 그에게 "가나안 땅과 상속자"를 주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이처럼 ‘모레’는 이스라엘에게 신성한 장소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장소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모세는 이렇게 설교했다.
신명기32: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호세아10:12에서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교훈)은 단비처럼 우리 마음을 적셔 주시고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
■ 말씀나눔
1.우리들에게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이같이 중요한데, 그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2.지식의 진리가 아니라 영의 진리(영적 진리)를 깨달으면 그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는가?
3.우리가 영의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어떻게 예배해야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