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관점 :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점
역사는 거대한 바다와 같다.
역사라는 그 깊은 바다를 누구도 한 번에 다 알 수 있겠는가?
역사 이래로 그 동안 수많은 사학가들이 나름대로의 종교, 철학, 과학, 유물, 민족주의 <사관>이
등으로 각자마다 그물을 짰다.
그리고는 바다에서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을 잡으며 살아왔다.
어떤 역사관은 독이 든 생선을 잡고, 어떤 역사관은 생계형에 도움이 되는 물고기를 잡아왔다.
사관은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인생이나 국가의 통치이념이나
한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실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국주의 사관이 기반이 될 때는 열강들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했고,
유물사관을 추종한 공산권국가들은 인간을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인간은 사상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을 받는다.
때로는 역사관과 사상에 따라 한 인간을 완고한 타협이 없는 고집쟁이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더 넓은 세계를 두루 보고 사는 사람으로 자유롭고 평화적인 방향을 모색하며 살도록 해 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관으로 정신세계를 구성하고 이 시대를 바르게 분석하며 살아갈 것인가?
우리나라는 매우 다양한 역사들이 혼재되어 있다. 유교사관, 불교사관, 도교사관, 기독교 역사관 등이 있지만,
오늘날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은 한 개인의 삶의 방식을 좌우한다.
직선사관과 윤회사관
세상의 종교마다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솟아 나와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고 아름답다.
옹달샘에서 시작된 물은 산 골짜기의 내를 따라 흐르고, 강을 따라 바다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떠 있다가 비가 되어 다시 땅 속으로 스며들고, 다시 옹달샘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보면 무한 반복의 <순환사관>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은 자연계의 법칙으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으로 보면
<직선사관> 안에서 순환사관으로 <나선형 사관>처럼 여겨진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한 마디로 <창조부터 타락 - 구속 - 완성>이라는
<종말론>에 기초를 둔 《직선사관(lineares Denken)》이다.
어거스틴과 기독교 역사관
이러한 기독교 역사관을 확립한 인물은 교부 어거스틴인데,
그의 역사관은 《직선사관, 섭리사관, 종말사관》으로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기독교적 섭리사관 (掘理史觀)을 확립한 역사철학저이다.
그의 역사관이 신학적사관(神學的史觀)이라 하여 일반 역사가들에게는 거부를 받고 있으나
그에 의하여 중세의 역사철학이 정립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거스틴(아우그스티누스)은 로마가 멸망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인간이 사회와 문화, 그들이 지상에서 형성하는 정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
분명한 사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우주의 보편사적 흐름을 통일적으로 이해해 보려 했던 <최초의 역사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를 보는 관점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통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 특히 어거스틴의 역사관을 계승하는《개혁주의 역사관》은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직선사관(直線史觀)에 입각해 있다.
헬라(그리스)의 《순환사관(循環史觀)》과 불교의 《윤회사관(輪回史觀)》을 부정한다.
여기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철하는 직선사관(直線史觀)의 관점에서 풀어가려 한다.
뿌림과 거둠의 법칙
이 법칙은 세상에서 공통적인 법칙이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럴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모든 종교는《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보는 관점이 동일하고,
또 어떤 부분은 미세한 차이가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현저하게 다르다.
오늘 살펴볼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삶과 그 결과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은 같은 점도 있고,
미세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고,
현저한 차이도 있다.
"행한(뿌린)대로 거둔다."
이 부분은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기독교 역사관을 명백히 보여준다.
기독교 역사는 철저히 순환사관을 배격하며, 윤화사관은 손톱만큼도 없다.
기독교 역사관은 바울의 역사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의 역사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관이다.
바울은 현실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지신의 육신과 싸우고 있으며, 그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은 승리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주셨고, 또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며 안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정죄받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해 주시는《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인 <죄와 사망의 법>의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육신의 굴레에 종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 죄의 유혹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논증합니다.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