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는 왜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까?
탕자는 왜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까?
예수님은 여기에 침묵하신다. 그러나 우리들의 상식으로도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답을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는 아담에게서 찾을 수 있고,
둘째로는 다윗의 아들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안에 있는 숨겨진 탐욕은 발동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영혼에 찾아오는 것은 일상의 권태로움과 싫증이다.
결국 권태와 싫증은 점점 반감으로 자라고,
그 반감은 점점 둘째 아들과 같은 선택을 허게 만든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권태기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나타나는데, 마침내 깊은 침륜에 빠져 집을 나간 탕자인 둘째 아들이 맞이했던 최후와 같다.
둘째 아들은 무엇이 이토록 삶의 권태기가 시작되었을까요?
우리가 권태기라는 말을 사영하는데, 한자로는
권태(倦怠, 게으를 권, 게으를 태)라고 씁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 단어가 "게으름"을 의미합니다.
"게으름은 또 다른 게으름"을 낳습니다.
옛 어른들은 게으름을 학문을 하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태만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즉, 학문하는 것은 귀찮고, 내가 좋아하는 것 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놀고 싶은 마음이 나를 이기면, 학문하는 일은 저절로 뒤로 미루게 됩니다. 미루고 미루게 되니 포기하게 되고, 아예 손을 놓아버립니다.
게으름은 '책 권(卷)' 먼저 "구부리다, 주먹 권" + 아래에 무릎을 꿇은 모양, 병부절(卩)'입니다
책 권(卷). 예전에는 대아무로 책을 만들어 손으로 주먹을 말듯, 구부렸습니다. 그래서 "말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사람인 변(亻)이 추가된 합성어입니다. 倦 = 亻+ 卷 "책 펴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 = 게으른 사람"
예전에나 지금이나 배움을 통해 자신이나 가문의 신분이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공자께서도 "하루 종일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생각해도 다 무익한데, 오로지 배우는 것은 달랐다(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고 하셨습니다.
한나라의 광무제도 군대를 이끌고 다니면서조차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手不釋卷 : 수불석권).
釋은 '풀 석'으로, '풀다, 풀어주다'로 '석방(釋放)하다', '해석(解釋)하다'로 쓰임
조맹덕(조조)도 스스로 "늙어서도 배움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왜 자기 계발에 힘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倦(게으를 권), 怠(게으를 태)
倦 : '게으르다', '싫증나다', '피곤하다' 등으로 게으르다, 진력나다, 고달프다, 걸터앉다
怠 : 게으를 태, 느릴 태, 거만할 태, '게으르다, 게을리하다, 거만하다, 업신여기다, 깔보다, 맺힌 데가 없다, 느리다, 그만두다, 물러서다.' 등으로 쓰인다.
怠(게으를 태, 새 이름 이 , 안락할 이)
• 怠 = 台(별 태), 태아(台) + 心(마음 심)
• 마음속에서부터 생겨난 '게으름'
뱃 속에 태아같이 빈둥빈둥 놀고 가만히 있으려는 마음 즉,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말한다. 신앙에서는 "영적 침체"라고 한다.

'지루함'에 감염된 영혼이 은밀하고 교활한 죄의 계략에 더 빠져들지 않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