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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서울은 풍수와 유교가 어우러진 곳

[明泉] 맑은 샘물 2023. 7. 4. 11:15

궁궐터는 풍수를 따르고, 그 안에는 유교 사상을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가 무너지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이 개국되면서 조선은 철저히 유교 바탕위에 세우려 노력한 흔적이 서울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 개성에서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궁궐과 대문의 이름을 지을 때 무엇에 기반하여 새 이름들을 지었을까?
조선 창건초기 임금이 계신 곳, 조정대신이 모여 국사를 논하던 곳을 법궁(法宮) 또는 경복궁이라 했다. 이는 사서삼경의 하나인《시경》의'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했다.
'경복(景福)'은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정종은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제3대 태종은 개성에 남으려는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당시 경복궁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창경궁을 지었다. 이같이 하여 궁이 2개가 되었다.
창덕궁(昌德宮)은 태종 때 처음 세워진 궁궐로서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되라는 뜻을 담았는데, 이는 왕의 거처였다.

유교가 녹아있는 이름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 신(信) 디섯가지는 사람이 마땅히 항상가지고 있어야할 것들로 이를 오상도(五常道)라 한다.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이다.
4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맹자가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본 성선설(性善說)에 기반하여 펼친 도덕의 학문이다. 《단(端)》이라 함은 선(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사단(四端-4개의 곧게 세운 기둥)으로 설명하였다.
《예기(禮記)》는 중국 고대 유가의 경전인 오경의 하나로, 예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으로
시경·서경·역경·춘추와 더불어 5경을 이룬다.
『예기』에서 칠정(七情)과 함께 사단칠정(四端七情論)이라 하여 유교의 수양론(修養論)으로 발전하였다.『예기』는 이성에 합당한 합리적 사유를 비롯하여 인간이 어찌해야 인간다움을 갖출 수 있는《덕목》이 무엇인지를 철학적 측면에서 공경함과 절제를 통해 실현할 것을 말한 경전이다.
칠정(일곱가지 정서에서 나온 감정)은 희(喜) · 노(怒) · 애(哀) · 구(懼) · 애(愛) · 오(惡) · 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인데, ≪예기≫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하여 당(唐)의 한유(韓愈)가 <원성편 原性篇>에서 7정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중용(中庸): 치우치지 아니함≫에는 희로애락의 발현[發]이전을 ‘중(中)’,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감정으로 ‘화(和)’라 하였는데, 칠정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심리의 현실태를 총칭한 것이다.
이와같이 유교의 커다란 줄기가 한양도성을 지으면서 《유교국가》가 실현되기를 꿈꾸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사대문(四大門)은 종로구와 중구의 한양도성의 동서남북에 세워진 네 개의 대문을 말한다.
4대문의 이름은 각각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이다.
이는 유교가 바탕이 된 조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흥인지문(인), 돈의문(의), 숭례문(예)은 '인의예지'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도성 백성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하던 보신각을 세운 것은 동쪽에서 여름장마에 물이 한성까지 들어올 정도였다. 풍수지리적으로 무언가 보충해서 균형을 잡아야 했는데, 이를 위해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보신각은 널리 보(普), 믿을 신(信)이라는 한자로, '믿음을 넓게 한다'는 뜻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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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대문과 보신각, 인의예지신

서울 사대문과 보신각은 다들 알다시피 유교사상의 인의예지신을 기본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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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커다란 종이 있어 '종각(鐘閣)'아라고도 불린다. 鐘閣(종각)은 鐘(쇠북 종), 閣(집 각)이 쓰여서 '쇠북 집 즉 큰 종을 달아 두기 위하여 지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종로"(鍾路)라는 글자와는 다르다. 종로는 "술병 종"(鍾)을 쓰고, "종각"(鐘閣)의 종은 "쇠북 종"(鐘)으로 한자가 다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리는 문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다.  얼마전 불량한 사람이 불을 질러 화재가 나서 재건하는 일도 있었다.
북문은 초창기에는 북대문이라 사용하다가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의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으나 이후 중종 때에 '청(淸)'을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靖)'자로 바꾸어 '숙정문'이 되었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정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굳은 듯 하다. 지금은 홍지문(弘智門)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智)가 쓰인다.
敦은 '도타울 돈'이라는 한자로, '도탑다'를 뜻한다.
관계가 매우 가까운 사이에 쓰는 말이다.
篤은 '도타울 독'이라는 한자로, '도탑다', '돈독(敦篤)하다', '진실하다' 등을 뜻한다.
죽마(竹 + 馬), 어릴 때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친구 사이라서 두 사람의 우정이 매우 남달리 도탑고, 절친한 관계라는 데서 만들어진 한자이다.
돈독(敦篤). 돈독한 우애나 우정으로 살갑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敦篤(돈독) 篤實(독실) 篤信(독신) 篤農(독농) 篤志家(독지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했는데, 동대문(東大門)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하여 동쪽의 어질인(興仁, 어짐이 흥함) 흥인지문에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의(義)'였다. 그래서 의를 두텁게 하는(敦) 뜻으로 돈의문(敦義門)'이라 붙였다.

세검정과 모래내

한성 북쪽문으로 나가면 산세가 아름답고 물도 맑은 곳이다. 그래서 정겨운 우리말 이름이 붙여져 '모래내'라고 했다. 모래가 있는 냇가라는 뜻이다.
홍제천이 흐르는 그곳에 세검정(洗劍亭)의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모래가 많아지고 물이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세검정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는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해석한다.
칼을 갈아 날을 세우는 것과 칼을(劍) 씻었다(洗)는의미는 엄연히 다르지 않는가?
칼에서 베는 부분이 무디어진 것을 갈아서 날을 세우는 것인데, 반정을 모의하는 자들이 모여서 칼을 갈았을까?
정말 세검(洗劍)이라는 말이 장검의 칼을 갈아서 생긴 말일까? 아니면 북방을 정벌하고 돌아오던 군대가 한성에 들어 오면서 왕에게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북대문으로 들어오기전 무엇을 했을까?
장수들이 피로 물든 칼을 닦지 않고 왕을 알현하는 일을 상상해 보라. 전장터에서 피가 묻어 굳어지고 엉킨 피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상태로 한성에 들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몸도 씻고 칼도 씼고 왕을 알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어찌 오랑캐의 피가 뭍은 칼을 차고 도성에 들어 올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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