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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야무지게 뜯어 먹기

[明泉] 맑은 샘물 2022. 11. 28. 23:18
눅24장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동행하시며 주셨던 말씀을 보라.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뇌에 벼락 치듯 사고 전환 :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설교가 밋밋하다는 것입니다. 늘 뻔한 설교입니다. 그래서 쉽게 즐겁게 해 주려고 양념을 많이 넣습니다.(MSG/ '글루탐산일나트륨(Monosodium glutamate)'의 약자. MSG는 그 자체로는 맛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첨가하면 음식의 맛을 좋게 함)
설교자가 은혜를 끼쳐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성령의 역사에 맡겨야 합니다. 설교자의 몫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본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글자 속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문맥과 행간과 그 속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종종 단어 하나가 그 비밀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얼마나 놀랍고 커다란 의미를 담아 놓으셨는지.

때로 평범해 보이는 단어 하나가 반전을, 역설을, 전체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거기에 담긴 <사상을 이해>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 지성이 뻥 뚫려야 합니다.
눅24: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 지성과 마음에 천둥치듯 :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께서 주신 모든 말씀은 선포입니다.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말씀에 동의해야 합니다. 지성에 빛이 들어오는 영광스러운 일은 성령이 우리 눈을 열어주실 때이다.
눅24장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동행하시며 주셨던 말씀을 보라.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 권위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문자인 글로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녹음해야만 정확히 남길 수 있지만(성경시대에는 불가), <말>을 글자로도 남길 수 있습니다. <말>과 <문자로 남긴 글>은 그 권위가 동일합니다. 임금이 한 말을 받아 적어 그대로 선포하면 그 포고문이 임금의 어명이었던 것처럼.

 난독증 - 글은 읽는데 뜻을 모른다(?)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성경을 읽을 때 난독증이 많았다. 우리시대에 성도들은?

글자는 읽을 줄은 아는데, 뜻을 모르는 <난독증>이 문제인 것이다.
1960년대에는 글장님을 없애려 국가가 글을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글을 읽는데, 글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매우 심각하여 우리나라 <난독증>인 분들이 많습니다.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가깝습니다. 글을 읽어도 뜻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신학자가 이러한 난독증이면 제멋대로 해석을 합니다. 또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사용하는 목사들이 자기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워치만 니
그러면 글자는 객관적인 <로고스>이고, 못 깨닫다가 깨달으면 그것은 내게 주신 말씀 곧 <레마>인가?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했던 이는 누구인가? (중국의 '워치만 니'의 주장, 그는 경건주의 운동의 하나였던 영국의 케직운동을 이끈 '제시 펜 루이스'의 글을 번역을 많이 한 인물로 한때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을 발간함). 이것을 그대로 대단한 발견 인양 그대로 인용한 이가 여의도 대형교회 목사.


●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처럼 :지성과 사고(思考)에 영적 지진이 일어나야

그렇습니다. 성경이 저런 말씀이 숨겨져 있었나?
아~ 그랬구나. 만일 나의 지식으로 한 번에 성경이 이해된다면 그것은 아주 기초적이거나 상식입니다.
성경은 1차적, 2차적, 3차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분도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유용합니다)
대부분 1차 의미에서 적용하려고 합니다.
1차적 의미 : 내가 듣고 싶은 수준(아전인수식 해석)
- 내 지식의 수준에서 읽는 것
2차적 의미 : 평면적 지식에서 얻는 지식
- why? - how to? 질문을 던지며 묵상으로 얻음
3차적 의미 : 성령이 나에게 깨닫고 하시는 말씀
- 주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깨닫고 지평을 넓혀 주심

● 이것이 큐티의 맹점(?)
어떤 부분을 읽고 그 말씀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레마(?)라고 적용합니다. 레마로 해석하려는 것은 성경을 점보는 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자기에게 주신 레마[말씀]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점쟁이 수준입니다.
성경 어디에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까? 지가 그렇게 생각하고는 무슨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주장을 떠벌린 것입니다.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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