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무(無)는 없다는 뜻인가?
0(零, 영)은 무(無, nothingness)인가? 무(无)인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아라비아 숫자 0(零, 영)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수학으로 들어가면 조금 생각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아라비아 숫자 0(零, 영) 개념은 수를 표기하기 위한 수로 사용하고,
-1보다 크고 1보다 작은 정수이다.
또 수직선과 좌표계에서 원점을 표기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수학적 계산에서 사용되는 0은 "없다"인가? 아니면 가상의 숫자인가?
0은 -1, -2보다 1, 2가 큰 수이다.
그러면 '0'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숫자상으로 없다는 표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있다, 없다를 나타내는 한자
冇[없을 유]와 有[있을 유] & 無[없을 무]와 舞[움직여 춤출 무]
• 冇(없을 유) : 아직은 없다는 뜻
왜 이 글자가 없다는 뜻인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은 없다"는 뜻이다. 한 일(一)과 뚫을 곤(丨)이 눕혀진 형상으로 삐침별처럼 누여 놓았눈데 이는 손수(手)의 변형이다. 갑골문에서는 손을 나타내는 又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 형태로 '가지다'(to have)의 뜻을 나타냈다.
그리고 우측에 冂은 머리나 혹은 덮개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 덮개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데 쓰인다.
아직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할머니가 손자에 "쓰개" 가져오너라.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은 '(머리에) 쓰는 모자'를 말한다.
* 쓰개는 옛날에 머리에 쓰는 모자를 말한다. 주로 여인이 머리에 쓰는 것을 "쓰개"라 부른다.
• 有 (유) : 있다는 의미
있을 유에 쓰이는 《冃》는 쓰개 모라는 글자이다. 안에 두이가 양쪽 면에 닿지 않았다. 요즈음은 달월로 통일해서 쓴다. 본래는 冂에 二는 冂(멀 경)과 二 (두 이)로 구성된다.
두 이(二)를 넣어《쓰개》 모( 冃)가 된다.
머리에 쓰는 "모자"를 말한다. 지금도 대만에서는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 중국 한자에서는 쓰개모(冃)가 아니라 <月>로 표기하고, 둘을 같이 묶어 '육+달월부'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0을 "없다(無, nothingness)"라고 한자로 쓰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冇[없을 유]를 써야 한다.
예를들면, 방송에서 무명(無名)의 독지가(篤志家)가 후원을 했다고 앵커가 말을 했다고 해보자.
그 말은 독지기가 없다는 뜻인가? 아니다.
독지가는 분명히 있다. 이름도 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독지가의 이름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0은 없다가 아니다. "0"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른 숫자와 합쳐지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1과 합쳐지면 10이 되어 십이 된다.
1 다음에 0이 무한히 붙는 순간 어머어마한 숫자가 된다.
"없다와 정말 없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왜 우리는 동쪽에서 해가 뜬다고 할까?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정답은 아니다.
그런데도 해가 서쪽에서 뜨나요? 하고 질문하면
모두가 '아니요, 동쪽에서 뜹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이 대답도 틀린 대답이다.
그러면 '없다'는 글자를 표기하려면 무엇을 써야 하나?
0은 "없다" 인가 "정말 없다인가?
0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0은 "있다"가 맞는가?
그렇다.
전혀 없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면 0을 무엇으로 써야 하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0과 1의 조합으로 프로그램을 짠다.
그러므로 0은 없음이 아니다. 있음이다.
그래서 0은 수학이나 철학에서 공(空)이라고 쓴다.
공(空) '비어 있음'이지만, 언제든 채워질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들이 학교에서나 일상생활에 0을 읽을 때 "영"이라고 읽고,
군대에서는 왜 "공"이라고 읽을까?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
1980년을 읽을 때, 일구팔영이라고도 읽지만,
<일구팔공>이라고 읽어야 듣는 사람이 정확하게 이해할 때가 있다.
불교에서는 공(空)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만일 0이 없다라는 의미라면, 1980년이라 표기했을 때 198이 아니다. 0은 앞의 것들에 추가되어 ×10의 의미가 된다. 있음이다. 홀로 있으면 당장은 없음이지만, 앞에 무언가 숫자가 붙으면 ×10이 되는 것이다.
우주를 공간(비어 있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비어 있는가? 아니다.
무수한 행성들, 수천억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이가 많이 비어 있다.
'빈집'은 《집이 없다》가 아니다.
'현재 집에 사는 사람이 없어 비어 있다'는 뜻이다.
'공(空)'은 실체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예를들면 0은 설계도이다. 아직 건물은 없다. 하지만 언제든지 설계도는 건물이 세워지게 할 수 있다.
설계도가 없다면 건물도 없다.
컴퓨터에서는 0과 1의 조합으로 현상계에 <글자, 그림, 캐릭터 등> 여러 가지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질은 사실 0과 1 밖에 없다. 다양한 조합들이 모여 현상계에 나타낸다.
그러므로 0은 冇(없을 유)이다.
비록 0과 1, 그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 밖에 없지만, 그 조합이 캐릭터나 어떤 것이 현실에서 무가치게 쓰이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수억의 가치로 실제 거래가 되는 《아이템》이 된다.
그러므로 공(空)은 무가치함이 아니다.
어머어마한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空)은 때로는 가득, 전체를 의미한다.
우주공간 비어 있지 않다. 우주공간(宇宙空間, outer space)은 지구의 대기를 포함한 천체 사이 성간의 공간이다.
중국에서 유무(有無)
중국에서는 유무(有無 ; 있음과 없음, 상반된 개념)로 사용하여 있음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했고,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들도 그렇게 배워왔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맞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철학으로 넘어가면 달라진다.
공(空)의 개념은 노장사상에서는 무(無)로 표현했다.
무(無)는 없음이 아니다.
없을 무는 이렇게 외우자. 손으로 나무들을 올려 놓고 아래에 불을 놓았다. 맨 아래에 불(火= ....) 점처럼 생긴 네개는 불화(火)을 피워 놓고 그 위에 나무들과 어떤 물체를 올려 놓은 형상이다. 물체가 불에 타서 형체는 없다. 그 형체는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가 되어 남아 있다. 이것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물체가 불에 태워지면서 열과 남아있는 재의 형태가 된 것이다. 형체는 없어도 재가 남아 있다. <물체 = 열+재>로 변형된 것이다. 그러므로
無는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無[없을 무]는 본래 舞[움직여 춤출 무]자로 무용(舞踊)을 춤추는 모양의 동작을 나타내는데 쓰였다. 즉, 네개 점은 발이 움직이는 동작을 상징화 한 것이다.
실제로 애초부터 없었다면 없음은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나?
정말 없다, 처음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없다는 말은 "무(无)"로 표기해야 옳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과 특히 철학하시는 분들조차 이를 오해하고 자신들의 추리로 곡해하여 왔다. 공(空)을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무(无)라고 머리에 생각한다. 공(空)의 본질이 엉뚱하게 사용된 것이다.
철학 혹은 사상에서는 "공(空)=무(無)"이다.
공(空), 무(無)는 아주 없음이 아니다. 즉, 절대적인 없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없다'는 단어는 한자로 무(无)를 써야 한다.
지금은 无를 無의 간자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본래 간자체가 아니다.
无은 정말로 없다, 전혀 없다는 뜻인데,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글자이다.
원래는 있었거나, 현재는 없다 혹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는 있을 것을 나타내는 글자는 무(無)이다.
우리는 舞 [움직여 춤출 무]를 줄여서, 무(無)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자로 무(无)라고 쓰인 것은 "애당초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느 손님이 찾아와 부모님이 계십니까?
"예, 부모님이 아니 계십니다."(無)
두 가지입니다.
1) 지금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계시는데 출타하셨습니다.
2) 또 하나는 부모님이 계셨는데 돌아가심으로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무(無)를 사용해야 옳다.
그런데, 중국어에서는 無를 획수를 줄여서 간자체로 无로 쓰고 있다.
이것이 잘못 쓰고, 사용 있다는 증거가 있다.
문어체 한문에서 "없다(無 = 无)"로 쓰고, 구어체서는 '없다'라는 표현할 때 구어체 백화문에서는 没有(méiyǒu, 몰유)라 쓰고 있다.
왜 그럴까?
한자가 한족문자가 아니라서 그렇다.
원래 한족에게는 글자가 없었다.
동이족이 만든 한자를 가져다 쓰다 보니 원래 글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모르고 사용한 것이다.
글자의 본래 뜻을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어에서 无 = ん로 사용하고 있다.
ん은 뜻이 없다. 우리말에도 ㅇ은 안 붙여도 일을 수 있다. ㅇ가 안 붙여졌어도 [ㅕ+ㄴ]은 연이라고 발음한다.
이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히라가나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히라가나(ひらがな)는 한자의 9세기 경 초서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조사 "활용어의 어미" 조동사 등을 표기하는데 반드시 사용된다.
히라가나(平仮名, ひらがな, 임시문자 혹은 가짜 문자)에서는 " 无 = ん"으로 쓰고 있다.
한글 표기는 ん을 [n] ㄴ과 [ŋ] ㅇ으로 표기한다.
일본어에 ん [ŋ]로 시작하는 단어가 없다.
이처럼 중국어에서 동사성 한자에서 반대말을 나타내는 경우는 명사 앞에 '비(非)', '불(不)', '미(未)' 등을 붙여 쓴다.
철학에서 무(無)는 어떻게 쓰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철학에서 무(無)는 "전혀 없음"이 아니다.
즉, 인공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의미한다.
철학의 시초가 되는 무(mu)는 산스크리스트어로 'silent'(침묵, 입울 다물다)이다.
이것을 한자로 음차 한 것이다.
귀가 먹다(안 들린다) 경상도 사투리에 귀를 무-ㄷ다(mer-ta). 귀가 안 들린다는 뜻이다.
한자로 無는 본래 '춤을 추다', 즉 舞(춤출 무) 자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금문에서 예서로 넘어오면서 無로 변형되었다.

지금은 - 무가당(無加糖), 만무(萬無) -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무위(無爲, action without intention)는 어떻게 사용되는가?
무위는 전혀 가미가 되지 않은,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전들을 읽을 때 저자가 어떤 단어를 사용하였는지를 보아야 하고,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오역(誤譯)이 되고 만다.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라.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의 한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