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자녀인가? 용서받은 죄인인가?(forgiven sinner)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또 죄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과 죄용서
1.소명
구원의 출발점은 부르심 곧 내적 소명입니다.
외적 소명은 자연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는 방법입니다.
복음전도자가 말씀(십자가의 도)을 전하게 하심은 외적 소명입니다. 그 복음에 붙잡히는 사람과 반응도 안하고 도리어 거부하는 사함도 있습니다.
외적소명은 구원받을 기회가 주시는 부르심입니다.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초청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미신 손입니다. 내적소명이란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우리로 하여금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성령께서 역사해 주심으로 죄인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소명은 택함받은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납니다.
내적 소명은 이와같이 성령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케 해 주는 은혜입니다.
복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은 일하십니다.
2.중생
그들에게 곧바로 중생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무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즉, 그리스도의 새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그 심령에 심겨지고, 그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작용으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하심(복음)을 믿는 자에게 적용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3.회심(하나님께로 돌이킴)
그러므로 그는 의식 안에서 놀라운 작용이 일어납니다. 눈물로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합니다. 이 회개는 지난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이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을 대적한 죄인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있는 심판받을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할 때에 성령이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정결케 씻어 깨끗함을 입고, 죄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4.신앙
이제는 그리스도만 붙잡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며 연합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영적 유아기로서 그리스도를 배워가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어머니 다운 돌봄을 통해 성숙해 가는 것이지요.
진리를 알고 싶어하고, 기도의 맛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 은혜, 구원에 관하여 배워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말씀의 은혜에 미각이 생기고 영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신앙과 함께 칭의를 곧바로 깨닫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깨닫기도 합니다.
5.칭의(의롭다하심)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다 인정하시는 법정적 선언입니다. 칭의는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심, 죄용서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덮어서 없는 것으로 간주해 주시고, 의롭다고 칭하여 주신 것입니다. 즉, "칭의"는 우리가 주장할 것이 아닙니다. 나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죄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한자로 '稱義'(일컬을 칭, 옳을 의)는 '옳다'고 일컬어 주는 것. 영어로 'justification'로 번역하였는데, 인간이 죄의 책임과 처벌로부터 의롭고 자유롭게 여겨지는(made or accounted just, or free)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칭의(Justify, Justification )는 본래 법률의 용어의 하나로 재판에서 "무죄"로 선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의는 우리의 행위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를 믿는 자에게 우리에게 전가하시고,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롬 3:21-26).
이를 수동태로 이신칭의(以信稱義)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해진다'고 마르틴 루터가 사용했습니다.
칭의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가 없다고 여기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우리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시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한 이력이 남아 있고, 또 우리 안에 자범죄와 고범죄를 지을 경향성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역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뜻이다.
죄성, 죄의 경향성(죄의 성질)
이는 죄의 경향성은 본성입니다. 옛사람의 성품이며, 죄를 사랑할 때의 습성입니다.
이 부분은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실 때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로 일평생 싸워 이기며 그리스도만 의존하여 살도록 하심입니다. 만일 이것까지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죄를 안 지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의지배, 은혜의 통치(지배)
우리가 은혜의 통치 아래 있으면, 절대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벗어나면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갑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죄를 짓지 어니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 밖에서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용서(구원)받은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길 능력이 있습니다.
은혜에서 벗어나면 빈번히 죄에 실패를 합니다.
천국에 가면 거기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붙여지는 별명이 '용서받은 죄인(forgiven sinner)'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용서를 받았지만, 전혀 회개하지 않고 산다면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사람이 되었을 때 "칭의로 얻는 구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은혜에 매여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원죄에 대하여 죄 용서를 받고 완전해졌다면 성화도 필요없고, (구원파들이 주장하는 대로) 죄를 마구 지어도 천국 가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맞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라는 말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택함받은 자에게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나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나의 노력이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그렇게 구원해 주신 구원을 우리 스스로 완전하게 지키고, 우리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죄를 짓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은혜와 우리 안에 정직하게 죄를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은혜에 빚진 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그 은혜를 못다 갚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로 말미암는 구원>이 우리의 원죄에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공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할 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옛사람, 옛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자아를 날마다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결코,완전하지 않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도 천국갈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필요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그러므로 죄와 싸우라
그러나 이전에 지었던 죄와 구원받고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지은 죄는 치원이 다릅니다.
1.불신자였을 때에는 불량자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거룩해지거나 바뀔 능력이 0%였습니다.
2.그때는 죄를 지어도 즐겼습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을 받아도 무시했습니다.
3.양심에 화인 맞은 자처럼 하나님을 대적했고, 은밀하게 죄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용서를 받은 후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힘으로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전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후회하거나 반성으로 그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사람으로 살고 싶어 죄를 자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의 심판, 죄의 처벌, 죄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우리를 그 죄와 비참함에 빠뜨리고 그 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힘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공로와 성령을 힘입어 죄를 짓지 않으며 살거나, 죄를 짓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는 상태가 되길 원합니다.
하지만 칭의(의롭다 함)의 구원을 받은 후로도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여전히 "죄는 우리 마음에 있어서 왕 노릇"하고 우리를 범죄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죄를 이기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굳건히 믿어 옛사람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10->9->8->7->6.... 죄를 이기는 사람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원주민처럼 숨겨진 죄된 본성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하였다고 원주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산지에 숨어 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방관하고, 긴장이 느슨해지면 게릴라처럼 공격을 감행하여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므로 원주민(숨어있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것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건재한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남파간첩과, 고정간첩, 동조자를 잡아 내기 때문입니다.
이 땅 어디에선가 지금도 그들은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나라가 아직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들이 세력을 뭉치고 힘을 갖게 되면, 반란, 폭동, 혼란을 야기하고 나라를 전복할 기회를 만들 것입니다. 치안이 잘되면 저들은 활동을 제대로 못합니다.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깨어 근신하며 영적으로 강건하게 살아가면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언제든 죄의 활동들은 드러나고 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얕보지 못하도록 부단히 말씀을 붙들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