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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대한 오해(?)

[明泉] 맑은 샘물 2023. 4. 30. 15:41

書山有路勤爲徑, 學海無涯苦作舟
(서산유로근위경, 학해무애고작주)
    - 한유(韓愈) 당나라, 768~824. 문장가 -
“책이라는 산에 길이 하나 있으니 부지런함이 지름길이요, 배움의 바다는 끝이 없고 괴로움을 배 삼아 가야 한다”
배움의 바다는 끝이 없고, 학문의 깊이는 바다와 같아 고생이 따릅니다.
일평생 연구한다 해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늘 이제 막 시작한 초보라고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

우리가 알고 있는 <율법>은 랍비들의 말을 빌리면 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율법을 해석자만큼이나 해석도 다양하고,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구약을 오가며 성경을 보고 또 보고 수없이 연구하였어도 늘 어딘가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고, 나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율법과 십자가 복음 앞에 서면 마치 커다란 산과 깊은 바다 앞에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율법>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고, 바울의 서신서들 속에 율법에 대한 퍼줄을 맞출 수 있는 파편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는 성경해석자들과 설교자의 율법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설교저 자신도 확신하고 전했지만, 사실은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청중들에게 "믿습니까!"라는 말에 더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러한 설교를 들은 청중이 다시 되새김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1:11~14)

우리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청중인 우리들이 대부분 아직 복음에 대한 이해나 신앙이 깊지 못한 상태에서 강단을 통해 증거 되는 율법에 관한 설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 너그럽다는 말을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했는데 원어로는 "(태어날 때부터) 고상하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 바울과 누가가 가끔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 19:12에는 '어떤 귀인'으로, 고린도전서 1:26에는 '문벌 좋은 자'로 번역했습니다.
이는 생각이 깊고 마음이 열린 사람을 일컫습니다.
청중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율법에 대한 오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Μὴ νομίσητε ὅτι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 οὐκ ἦλθον καταλῦσαι ἀλλὰ πληρῶσαι·”
“ἀμὴν γὰρ λέγω ὑμῖν, ἕως ἂν παρέλθῃ ὁ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γῆ, ἰῶτα ἓν ἢ μία κεραία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ἀπὸ τοῦ νόμου, ἕως ἂν πάντα γένηται.” (“Don’t think that I ca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didn’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l.” “For most certainly, I tell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even one smallest letter  ① or one tiny pen stroke ② shall in any way pass away from the law, until all things are accomplished. ▷ ①literally, iota ②or, serif” (마 5:18)

주님께서 옛사람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말씀은 그동안 잘못된 해석을 그런 줄 알고 믿어왔던 청중들에게 교정해 주신 것이다.
헬라어 <플레로 사이>(πληρῶσαι)를 대부분의 성경이 "성취하다(fulfill)"로 번역했는데, 채우기 위해(fill up)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말의 의미

오늘날 대부분 알고 있는 율법, 나와 한국교회 성도들은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에게 율법에 관한 잘못된 지식(비판적이고, 편파적인 인식)이 주입되어 오랫동안 망령처럼 우리들을 지배해 온 것은 아닐까?
내가 오랜 세월 믿고 행동해 왔던 것들과 그 지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아 어니겠는가?
우리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설교자나 책(저자)의 오류적 해석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최대 피해자였던 것입니다.
그 저자들이나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 사탄의 속임수는 어디까지

<잘못된 해석과 율법에 대한 인식>
일부 이단들과 거짓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과 다른 인본주의 신앙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율법’은 성경이 말씀하는 율법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잘못된 것인지 확인해 보자.
율법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심지어 일상적인 표현에서조차 “저 사람 지나치게 율법적이야"라고 할 때는 "고지식하다.”라는 말로 사용한 것입니다. '고지식하다'는 생각도 나의 기준에서 나온 평가라면 그것도 오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도 그와 같습니다.

3. 과연 율법이 고리타분한 법일까요.

설교제목이나 책 제목이 ‘율법과 은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서술하다 보니 지나치게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복음과 은혜를 부각하면서 마치 율법은 개똥만큼 취급했습니다.
맞습니다. ‘율법은 정죄의 기능이 있고, 몽학선생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개똥만큼도 못하게 취급받아야 할 만큼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롬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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