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왜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동행하라 하셨을까?
너로 <억지로>
사람의 심리를 볼 수 있다.
사람은 <억지로> 하는 일에는 그 일이 크든 작든 분노의 감정 때문에 더 힘들고 화가 남는다.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이나 힘든 봉사를 하고도 즐거워하고,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몇 배의 능률이 오른다.
‘당신이 강제로 봉사하도록 징발된다면’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 이 말씀을 하셨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2km)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4km)를 동행하고(마5장41절)
예수께서는 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십리를 가라고 하셨을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단순히 <약한 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 도와줘라>는 의미일까?
정말 그럴까?
로마가 유대 팔레스틴을 지배하던 1세기 당시에 <어떤 법>이 있었을까?
만일 로마 군병이 갑자기 유대인을 향해
“야! 거기 너! 당장 하던 일 멈추고, 이리 와! 너 이 짐 좀 운반해라.”라고 명령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구레네 출신의 시몬(Simon of Cyrene)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사람들이 웅성거거린다.
그도 일찍 잠을 설치고 일어났다.
사람들의 모인 곳을 따라 구경하러 나셨는데,
로마 군병들에 의해 예수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의 일부인 가로로 매달릴 막대(2m가 넘는 나무토막)를 지고 가고 있었다.
그가 처형당할 그 나무 막대는 적어도 50~70kg이 넘는다.
십자가로 지고 골고다로 가고 있다.
간악한 병정들에 의해 채찍에 맞으면서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자
시간이 더디어지는 것을 참지 못한 군병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강제로 잡아
그에게 예수가 지고 가던 것을 대신 지게 한다.
"야, 너, 이리와, 이 거 매고 가!"
얼떨 결에 그는 쓰러진 예수를 대신하여 강제로(억지로) 십자가를 운반해야만 했다(마 27:32, 막 15:21, 누구 23:26).
왜 강제 노역(징발)을 시키는가?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2km)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4km)를 동행하고(마 5장 41절)
이해가 되십니까?
약자로 돕고 사랑해 주라는 말입니까?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지프차 형태의 4륜형 차량은 개인 소유이지만,
<전시 상황>에는 군대가 강제로 요구할 수 있는 징발대상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징발법 제1조 (목적) 이 법은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역에 있어서의 군작전상 긴요한 물자와 시설 또는 권리의 징발과 그 보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강제로 되고,
우리 백성들이 강제노역을 했던 것과 같다.
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에 사는 백성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정복을 당하면 지배자들이 종종 강제 노동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강제 징발(徵發) 제도를 알아야 한다.
고대 페르시아, 앗수르, 뿐만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관행이 있었다.(출 1:13, 14; 삼하삼하 12:31; 열왕기상 9:20, 21).
열왕기상 5:13~14절,
14 솔로몬이 그들을 한 달에 만 명씩 번갈아 레바논으로 보내매
그들이 한 달은 레바논에 있고 두 달은 집에 있으며 아도니람은 감독이 되었고
15 솔로몬에게 또 짐꾼이 칠만 명이요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팔만 명이며.
로마의 지배 아래서
예수께서 이러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로마군이 원하는 ‘봉사에 징발’될 수밖에 없었다.
‘봉사에 징발된다’(앙가 류오)는 페르시아 시대부터 내려오던 관습화된 제도였다.
그들은 공무(관리, 군인)를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나 말이나 배> 등을
언제든지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로마인들 역시 그와 비슷한 제도를 시행했다.
로마제국의 속주들에 사는 백성들은 정규세금을 내야 했고,,
이에 더하여 정기적으로 또는 특별한 경우에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좋아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제국은 물자를 운송할 때 무단으로 가축, 마부, 마차를 징발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한 그리스 역사가는 “누구든 군대의 화물을 일정 거리만큼 운반하는 일에 징발될 수 있었고,
누구든 지배자들이 시키고자 하는 온갖 봉사를 수행하도록 강요당할 수 있었다.” 고 말한다(마태 27:32).
이처럼 강제로 징발할 때 징발을 당하는 사람은 징발 대상을 몰수당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유대 속담에 “앙가레이아(징발)는 죽음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 얼마나 불공정한 처우인가.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지배하는 이방인 권력자들에게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징발되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시키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또 누구든지(권세 있는 자가) 너로 <억지로> 오 리(2km)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4km)를 동행하고(마 5장 41절)
굴욕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몹시 분개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왜 부당한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투로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왜 예수는 만일 권위를 가진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합법적 봉사를 요구한다면
그들에게 적의를 품지 말고 그 요구를 따르라고 하신 것일까?
당시 왕이나 정부가 요구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었다.
징발에 대해 불응 시에 어떤 종류의 처벌이 있었을까?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불시에 징발령이 내려서 군인이 당신의 어린 나귀를 끌고 간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
나귀를 잃는 것에 더해서 두들겨 맞고 싶지 않다면
저항하지도 불평하지도 말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역설"의 의미
"만일 누가 시키든 그것이 합법적인 요구 사항이라면 기꺼이 이행하라"는 말씀하신다.
‘당신에게 <권위 있는 자>가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라고 할 때에 당신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의 법에도 순종해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라"
사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얼마나 속상하고 화가 날까?
악감정 북받쳐 오를 수도 있다.
부당한 요구에 응한다면 <내적인 평화>를 잃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해결 방법은 이 것이다.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예수께 억지로 2km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4km를 동행하라.
왜 힘들게 십리를 가야 하는가?
예수의 말씀은 그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하라.
아니 기꺼이 그렇게 하라.
억지로 간다면 분명 "내가 지금 이용당했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동행해 준다면 그것은 억지가 아니다.
당신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행한 것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
이 원리를 알겠는가?
우리들은 누군가에 지배당하거나 시키는 일을 할 때에는 솔직히 그 일 하기가 싫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마음에 상처가 없다.
아니 평화가 깃든다.
도리어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는 세상은 그렇다.
"억지로" 할수록 더 힘들다. 피곤하다. 싫다.
하지만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고 “억지로(강요)"가 아니라
받아들 나에게 요구보다 더 많이 간다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고, 보람일 수 있다.
그가 시키는 일은 <억지로> 해야 할 일이다.
또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마음에 억울해하고 상처가 남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은 상처로 남지 않고 보람이 생긴다.
더 행복하게 생산적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기억하라.
내가 상대방이 원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한 것(기대 이상)은 하나님께 꾸어준 것이다.
즉,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