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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오해와 진실 마아세르(마아셀)

[明泉] 맑은 샘물 2023. 3. 2. 17:58

십일조, 헌금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헌금(獻金·offering)은 예수님 시대에는 ‘고르반(qorban)’과 ‘도라(dora)’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1)'고르반'(קָרְבָּן)–  특별히 하나님의 제단(altar) 앞으로 가져 나오는 헌물로 ‘하나님께 드림’(레 1:3, 민 31:50, 마 5:23∼24, 막 7:11), 또는 ‘예물’(레 1:2, 2:1) ‘헌물’(민 7:10)을 뜻했다.
2)‘도라(δῶρα, gifts)’ 는 대속죄일에 드렸던 소제물로 충성, 감사의 뜻이 담긴 밀가루, 감람유, 유향, 무교병 등인데, 우리말로는 ‘예물’(마 2:11, 5:23∼24, 8:4, 23:18, 히 5:1, 8:3∼4, 9:9, 11:4, 계 11:10) 혹은 ‘헌금’(눅 21:1, 4)으로 번역했다.
3)어떤 본문에서든 두 단어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한다. 고대사뢰에서는 곡물이나 제물로 드렸으나 문명의 발전으로 금전인 화폐로 대체되었다.
  - 성도를 위한 연보(고전 16:1)
  -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고린도 교회의 연보(고후 9:5)
 

십일조의 기원과 십일조의 두 종류

십일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마아세르(H4643: מַעֲשֵׂר)이다. 십분의 일, 십일조 tithe로 쓰였다(창 14:20).  이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아직 정착하지 아니하고 목축업을 하던 때였다.
처음으로 사용된 십일조는 그가 농사나 목축업으로 발생시킨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를 맞으러 나간 사람은 살렘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었다. 
그는 밤새 전쟁으로 지친 아브라함과 사병들, 도운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고, 멜기세덱은 승전하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승리케 하셨다고 말하며 축복한다.
이에 아브람은 전리품 가운데서 구별하여 멜기세덱에게 <마아세르>를 바친다. 
이것이 성경에 가장 먼저 나타난 십일조의 기원이다.
<마아세르>라는 낱말은 <숫자적으로 십분의 일>을 의미하지만,
전리품 중에  십분의 일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컨데, 아마도 아브라함은 전리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벼 농사라면 십분의 일을 구별하는 것은 쉬울 수 있다.
수확한 것 가운데 가마니 숫자를 세어서 열 개에서 하나씩 구별하면 된다.
그러나 목축업을 한다면 송아지나 혹은 양이 새끼를 열 마리 낳았다면, 십일조는 한 마리라고 할 수 있다. 
그 열 마리 중에 가장 허약하고 비실거리는 건강하지 못한 짐승이 십분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크기가 중간쯤인 것을 선택하여야 십일조인가?
아니면 가장 건강한 송아지가 십분의 일인가?
아니면 눈 감고 제비 뽑아야 하는가?
 
두번째 십일조
아직 신앙공동체, 예배공동체가 형성되지 아니한 때에 개인적인 야곱의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야곱은 외삼촌의 집이 있는 밧담아람으로 가다가 루스 땅(벧엘)에서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자원하여 서원했다(창 28:22).
이 때까지 십일조 개념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가 마롸는 것은 수입의 십일조였까?

아브람과 야곱은 자발적 헌신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숫자적 십일조가 아니라 감사의 십일조였다.
 
세번째 십일조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이 세번째가 오늘날 우리가 드려야할 의무로 주어진 십일조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드렸던 그 정신으로 드려야 한다.  
그 이유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신 명령을 살펴보자.
계명으로 명백하게 주어진 때는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전 광야를 행진할 때였다(출 23:16, 23:19, 34:22-26).
이제부터는 민족(국가) 공동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때이다. 이는 처음부터 땅의 소산 인 곡물, 열매, 과수 등을 '여호와께 구별된 성물'로 바치게 했다(레 27:30-32).
해마다 사람들은 십분의 일을 지정된 어떤 장소로 가져가 거기서 자식들과 노비와
마침 한 자리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게 하였다(신 12:6, 12:11, 2:17).
레위인(Levite)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 하게 한 것이다(신 14:22-29, 신 15:19-23).
히스기야(왕하 31:5 이하)와 느헤미야(느 13:12)와 말라기(말 3:8, 말 3:10) 시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
백성들은 다시 그들이 바쳐야 할 <십일조>를 바쳤으며,
성전은 복구되어 다시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땅과 그 소산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십일조는 땅의 소산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였다(참조: 28:20-22).
이와같이 신앙의 유지, 보존, 전수를 위해 십일조는 전적으로 종교적인 책무를 담당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이며,
또 구제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겔 44:30 이하, 말3:8, 말3:10).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오지 못하며,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한 국가에서도 납세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체납자를 아주 질이 나쁜 범죄자로 취급하고 강제로 징수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계명이다.

정리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한 <신앙공동체>이다.
여호와의 신앙으로 살아갈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 
당연히 여호와 신앙이 필요없다면 십일조를 할 필요도 없다. 
그가 약속하신 복이 필요 없다면 감사예물도 필요 없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갈  땅은 가나안 땅이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이 들어갈 곳도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신앙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유용한 제도를 고안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세속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레위기서이다.
그런데 레위기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그 일을 누가 담당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열 두 지파가운데 <레위> 지파를 선택하시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전무하게 하시려고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양식과 생활비를 주셔야 한다.
분업의 원리이다. 레위인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해 주시지 않았다.
그들은 11지파 속에 살면서, <종교적인 업무>하도록 요구하였다. 12지파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던 레위인은 주어진 토지(기업)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살아갈 생활비를 11지파가 담당하게 하신 것이다(민 18:24).
11지파가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면 그들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만일 레위인들이 직장이나 생업에 몰두하면 그들의 신앙공동체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만일 십일조가 없다면 나머지 11지파를 영적인 삶은 파탄나고,
그들의 신앙생활의 근간인 성전유지 보수, 관리 운영과 성경 필사, 관리와 제사집례 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목회자)들은 십일조로 살아가는 레위인이 바치는 '십일조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밖에도 매 3년마다 구제<가난한자,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쓰임>를 포함한 종교적 목적으로 십일조를 시행하도록 요구하였다(신 14:28-29).
십일조는 영적인 삶, 신앙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레위인들의 생계비(인건비)였던 것이다. 
출애굽하여 하나의 민족국가 신앙공동체를 갖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가시스템을 운영할 경비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직, 단체>는 후원금이나 정규적인 회비가 있어야 운영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커다란 조직인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민으로부터 다양한 세금을 거두어 들여서 국가를 운영하는 경비(공무원)와 사회제도를 위해 사용한다.
고대사회나 현대사회나 모든 <조직>에는 운영 비용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운영에 따르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고 후원받을 것인가?
정상적인 십일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있다.
십일조는 강요할 필요가 없고, 강제적인 것도 아니다.
반드시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광야에서나 가나안 땅에서나, 이 땅에 모든 교회의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왜 십일조가 논쟁이 되는가?

국가에 내는 세금에 토를 다는가? 
국민에게는 납세의 의무가 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지 아니하고 세금을 덜 내려고 그렇게 탈세를 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덜 내고 많이 받으려는 욕망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당하게 세금을 내라고 말한다.
또 어려울 때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것도 국가가 할 일이다. 문제는 세금이 많이 거칠 때이다. 회사는 상여금을 넘치도록 준다. 세금으로 내지 않거나 적게 내고 투자자에게 많이 나누어 주는 것을 택한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십일조에 대해 토를 다는가?
그들의 머리 속에 <사회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상 곧 공산주의는 가진자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들끼리 잔치를 하자는 얘기이다.
정당하게 십일조와 감사를 하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운영하는지를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하면 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인간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성경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논리>를 주장하고,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인본주의 단체>로 전락하고 만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다.
목사도 성도들도 모두 그리스도께 복종하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대로 하면 된다. 
초대교회처럼 유무상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십일조를 드리든, 감사로 예물을 드리든 그것은 그의 신앙의 척도이다.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

첫째로 '십일조는 무엇인가?' 레위기 27장의 후반부(레27:30-34)
둘째로 '누구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 민18:21-32)
종교적인 부분을 담당하던 레위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기업(토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 섬기고 백성을 위해 봉사했다.
이같이 종교적인 사역을 담당하던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답은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였다(민18:21).
레위인들도 자기들의 수입의 십분의 일('십일조의 십일조', 민18:26)을 바쳐야 했다.
여호와께서는 이것도 백성들이 바치는 것과 같은 동일하게 여겨 주셨다.
레위인이 바치는 이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주어졌다.
셋째로, '어느 곳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신12:1-14, 14:22-29)
십일조와 희생 제사는 '네게 보이는 아무 곳'(신 12:13)에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신 12:14)에서 드려야 했다.
이처럼 인정된 장소에서만 십일조와 예물을 바치도록 하였다(신 12:6).  
넷째로, 무엇을 어떻게 바치는가?
하나님께서는 땅과 곡식과 과실과 우양 등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성물'로 성별하여 의무적으로 헌물 하도록 계명으로 규정하셨다(레 27:30-33).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바쳐야 하고, 또한 레위인은 십일조의 십 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신약의 십일조
신약성경에서도 연보에 대하여 가르친다.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다(고후 9:5-7).
또한 후한 연보를 하되 '이를 얻은 대로' 하라고 했다(고후 9:13).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다(고전 10:31).
이와 같은 가르침에 따라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는 유무상통의 헌신생활을 한 적도 있다.
구제를 위해 바나바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밭과 집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충당하였다(행 4:34-36)고 말한다.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십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물질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될 것이다.
십일조를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다.
교회의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서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일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너무나 좋은 제도요, 빙법이다. 그것을 운영하는 방법이 잘못되거나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크기가 성공의 잣대가 될 수 없다.
그만큼 사회적인 의무도 많아지는 것이다.
대사회적으로 구제로 더 많이 지출해야만 한다.
할수 있으면 십분의 일(예비비)을 남기고 다 흘려 보내야 아름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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