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또 다른 표현들
3. 복음서 이외의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a) 그리스도의 나라.
예수께서는 그의 인성과 단단히 결속된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의 나라)만을 말씀하셨다. 오로지 이 의미로만 그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존한다고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그가 → 주 Lord(퀴리오스, 빌 2:9-11; 행 2:36)로 높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교할 때 예수님의 기독론적 강조를 고수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바실레이아를 계속 말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내리신 기독론적 해석, 즉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련성을 보존하였다: 오로지 예수의 인성에서만 하나님 나라는 현존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실레이아를 읽는 곳에서 초대 교회의 언어를 대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개념이 가장 오래된 전승층과는 다르다"(J. Jeremias, op. cit., 82)는 사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바실레이아를 말하는 대다수의 본문들이 옛 원본의 편집상의 수정으로 인정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막 9:1은 마 16:28보다 옛 것이며, 막 10:37은 마 20:21 보다 옛 것이다. 마 13:41의 바실레이아 투 휘이우 투 안드로푸(인자의 나라)는 마태복음의 고유한 표현이며, 마 16:28에서만 다시 발견된다. 눅 22:30의 종속절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가 마태복음의 병행구인 마 19:28에는 없다.
옛 사본들의 이러한 편집은 정당한 발전이다. 이리하여 요 18:36에 따르면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딤후 4:18은 모든 종류의 악에서 건짐을 받으며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아우투 에푸라니온)"라는 확신을 말한다(참조: 딤후 4:1; 벧후 1:11). 예수님의 인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의 불가분리적 관련성이 다음의 비교들에서 나타나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의 동의어가 되셨을 때 가장 명백하게 표현된다.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데(막 15:43) 비해 신자들은 "그들의 주"를 기다린다(빌 3:20). 예수님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막 1:15)로 요약되는데 비해, 야고보는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헤 파루시아 투 퀴리우 엥기켄)"(약 5:8)를 말한다. 제자는 예수님을 위하여(헤네켄 에무, 막 10:29),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헤네켄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눅 18:29) 자기 가족을 버린다. 이 현 → 세대 Generation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막 9:1), 혹은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 16:28; 참조: 눅 21:31과 막 13:29). 사마리아에서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다(행 8:12; 참조: 행 28:31).
따라서 "그리스도의 바실레이아라"는 구절 및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은 암시적(implicit) 기독론에서 명시적(explicit) 기독론으로의 추이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이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초대 교회에서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의해 배제되지 않았음을 명백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케리그마의 중심인 부활 이후의 기독론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서만 현존하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에 의해서만 하나님 나라를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결과이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결속되어 있기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동틈에 관하여 전파하신 복음은 부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 복음 Gospel 및 그의 나라의 선포가 되었다.
(b)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공관복음서 전승 이외의 케리그마.
예수의 설교의 중심 개념인 하나님 나라는 공관복음서 외에서는 가장자리로 옮아간다. 공관복음서 외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Cross)와 부활(Resurrection)의 기독론적 케리그마, 재림 및 죽은 자의 전반적인 부활의 기대 및 생명 Life(조에, 요한복음에서)과 의 Righteousness(디카이오쉬네, 바울서신에서)와 같은 용어들이 사용됨 등이 발견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에서부터 기독론적 케리그마 및 바울의 칭의론에 이르기까지 어떤 논리적 연속성이 있는가?
공관복음 전승에서 "바실레이아 투 데우"의 개념으로 사용된 동의어적 표현들을 살펴봄이 여기서 큰 도움이 된다: 마 6:33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와 그의 디카이오쉬네를 구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병행구 막 9:42-48에서는 그 대신에 다음의 서로 나란히 있는 두 가지 표현들,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영생에 들어가다 enter life, 막 9:43; 막 9:46; 참조: 마 7:13)과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다 enter the kingdom of God, 막 9:47)가 발견된다. 다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질문,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에(막 10:17) 대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하고 말씀하신다. "영생을 얻다"(막 10:17)라는 구절과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는 같은 표현이다. 바울은 롬 14:17에서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 계 12:10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헤 소테리아(구원 salvation), 헤 뒤나미스(능력 power) 및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서로 나란히 발견된다. "주의 영광 중에(엔 테 독세수)" 자리를 요청하는 구절(막 10:37)의 병행구가 마 20:21의 "주의 나라에서(엔 테 바실레이아 수)" 자리를 요청하는 구절이다. 눅 21:31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하였음을 언급하는데 비해 몇 구절 앞에서 예수께서는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아폴뤼트로시스)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언하신다(눅 21:28).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는 산상 수훈(마 5:3-10; 참조: 눅 6:20이하),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마 22:1-10; 눅 15:11-32; 눅 15:4-7, 눅 15:8-10), 공관복음 전승 자체 내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동의어들(→ 의 Righteousness, → 생명 Life, → 구속 Redemption, → 영광 Glory), 이 모두는 예수의 인성 안에 이미 현존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예수님과 결속되어 있고, 오직 그에 의해서만 중재되는 하나님의 이 구원하시는 행동은 공관복음의 전승 이외에서도 케리그마의 중심이다. 이리하여 요한은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 요 3:15; 요 3:36등)을 말하여 구원의 목표를 언급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의와 생명과 구속을 말한다. 바울과 요한의 저술에서 이 용어들은 엄격히 기독론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참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 참조: 요 3:15]; 및 바울 서신 특히 롬 6장의 "그리스도 안에"). 바울이 롬 4:5에서 하나님의 의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하심"에 있다고 선언할 때에 그는 예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설교의 중심적인 관심사, 이른바 가난한 자와 죄인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채택했다. 예수님의 설교의 미래주의자적 종말론도 그의 재림과 죽은 자의 전체적인 부활에 대한 기대에 보유되어 있다. 기독론의 발전인 바울의 신학은 예수님의 설교처럼 현재적 요소와 미래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데,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이 오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구원을 예수님의 인성과 결속하고 기독론을 구원론, 성령론 및 종말론의 방향에 따라 발전시킴으로써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의 계통을 일관성 있고 정당하게 전개하지만 그는 이것을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한 부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절했다.
(c)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신약성경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와 같다는 것은 공관복음 전승 이외의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들에서 이 두 표현이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때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먼저 나오면서 함께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엡 5:5)를 말하고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계 11:15) 세상 통치를 말하는 것도 동일하게 인정될 수 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왕 노릇과 하나님의 왕 노릇은 동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 노릇이 확립될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왕 노릇으로 넘겨질 것이다(계 5:10; 계 2:4; 계 2:6; 계 22:5).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신다(고전 15:24-28).
역사 비평(전승사)의 관점에서 보면, 성도들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요한의 예언은(계 20:1-7) 메시야 왕국에 대한 묵시적 동기를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실현보다 앞에 있을 시대로 해석한 것이다. 천년왕국설에서 1세기 유대교에서 널리 알려진 유사한 두 가지 유형의 종말론이 - 민족주의적, 메시야적 종말론과 우주적, 보편적 관점 - 합류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앞에 있을 시대인 이 메시야 통치의 기간이 유대의 묵시 기록들에서 다양하게 말해진다. 여하간, 그리스도의 왕 노릇과 하나님의 왕 노릇은 서로 계승하는 두 나라가 아니라, 결국 하나가 되는 한 그리스도의 나라이다(전천년 왕국설, 후천년 왕국설 및 무천년 왕국설의 해석에 관하여 전문 용어 해설의 → 천년왕국설 Chiliasm, → 수 Number, art. chilias). - B. Klapp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