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역한 자들을 돌이키심
목사님, 회심이 뭐예요?
"성경에 회심이라는 단어가 없는데(?)."
목회의 목표는 <회심 : 돌이킴>이어야 합니다.
만일 회심이 없다면 목회가 아니라 <먹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회심 없는 목회"는 목회는 없습니다.
"목회의 꽃은 회심"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 혹은 육적 그리스도인을 붙잡고 있는 것은 목회자에게 매우 고통스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리차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영국의 대표적인 청교도 목회자입니다.
그는 1638년 영국 국교회 사제 서품을 받고, 1641년부터 키더민스터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성도의 영원한 안식』, 『회심으로의 초대』, 『참된 목자』등이 유명합니다.
그의 목회에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외친 참된 목회자로서의 가슴앓이와 눈물어린 탄식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와 비참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들을 보내어 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척이나 슬픕니다.
우리의 영혼은 심히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귀를 막고 목을 뻣뻣하게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아아, 그때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할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선지자들의 외침과 같습니다.
그는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진저인 선지자들은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렘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배역(背逆)한 자식들아!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배역한 자식이라고 말씀하실까요. (背逆, 등 배, 거스를 역), 등을 돌리는 것과 심지어 거역하는 것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그리고 분에 넘치는 은혜를 저버리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어찌나 황송한 말씀인지요.
* 황송(惶悚, 분에 넘쳐 고맙고도 송구함)
배역은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회복되는 상처도 아닙니다.
배역은 반드시 하나님의 용서와 치료와 회복이 함께 일어나야만 고쳐지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고침(H7495: רָפָא 라파) : 고치다, 치료하다, 건강하게 하다(make healthful)'를 의미한다.
라파는 "사랑과 용서, 치료와 회복"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사 53: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배은(背恩)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최고 징계는 진노 곧 심판이며, "버림"(폐기처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주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영혼의 생사가 달린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킬 때 배역함을 고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배역한(H7726: שׁוֹבָב, 쇼바브) : 되돌아간, 배신(변절)의, 복종을 거부하는
- 슈브(H7725)에서 유래 '되돌아간 backsliding, 배교의, 배신(변절)의apostate, 복종을 거부하는 recusant'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배신하여 불복종하는 것을 묘사한다(사 57:17, 렘 3:14, 렘 3:22, 렘 50:6).
무관심하고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음
회심이란 무엇인가?
회심(回心)은 좁은 의미의 회심과 넓은 의미의 회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최초의 "돌이킴"을 말합니다.
이에 비하여 넓은 의미의 회심은 신자의 삶 속에서 이러한 회개로 반복적으로 새롭게 경험되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킴"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며 응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회심(슈브, 회심)은 거듭난 영혼에게만 일어나는 의식(意識)의 활동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풍족한가? 품꾼들도 배불리 먹는데 ..."
자신에 대한 자각, 그리고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그동안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생각이 전환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슈브) : 의지적으로 돌아갈 것을 결단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사오니" 그 자신 안에 죄에 대한 회개의 고백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살던 율법적인 자기 심판이 일어납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심판) 아래 있는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한 회개이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죄인의 영혼을 각성시키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회개의 토대는 중생(重生), 곧 거듭남입니다.
이러한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작용은 무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회개는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지, 정, 의>를 통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듭남(중생)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하여 회개은 인간의 영혼이 최초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의식의 활동입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이 또한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 안에서 각성된 우리의 영혼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중생하도록 명령하지는 않지만, 회개하도록 촉구한다(행 3:19, 16:31).
중생 없이는 회개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도 하고 후회도 하지만, 그것은 지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슬픔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용들, 중생과 회심은 일반적으로 <시간적인 발생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구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회심> 여부는 그의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과정을 볼 때 회심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임신이 없었는데 출산을 했다(?), 절대로 그럴리가 없습니다.
자연인이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킴(방향전환)입니다.
내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살던 내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돌이킴)입니다.
특별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와 믿음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단지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구원을 당연시하지는 않습니까?
예수께서 거듭남을 말씀하실 때 "아노센"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첫번째는 "위로부터 나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나 혈통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 곧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두번째는 "철저히 나다"는 뜻입니다.
겉사람의 의식활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사람까지도 철저하게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성령께서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이 그에게 임합니다.
그는 이제 죄와 더 이상 친구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도 그를 버립니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니까 죄를 버리고, 죄를 떠나고, 죄를 혐오합니다.
거듭나게 하시니까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세주로, 목자로 바라보며 따라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 공인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어합니다.
세례는 신앙고백입니다. 신랑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정결하고 순결한 신부가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연합입니다.
세례는 십자가에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는 가장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주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조건으로서의 넓은 의미의 회심은 <‘회개’, ‘중생’, ‘칭의’> 등으로 표현합니다(마 3:2, 요 3:3, 롬 3:24).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중생으로 <죄용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져 없애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거듭남을 인식합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혐오, 떠나는 결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 하셨다는 것을 알 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나님은 수없이 부르시고 기다리신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며, 이는 종말의 때에 재앙을 당할 처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욜 2:12~13).
기독교는 회심의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였던 경험을 사도행전에 세번이나 간증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체험은 훗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시건입니다.
하나님이 주권 아래 준비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심오한 회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어거스틴(A. Augustinus),
종교개혁자들은 마틴 루터(M. Luther), 칼빈(J. Calvin), 존 오웬, 존 번연,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휫필드, 스펄전, 데이빗 브레이너드, 허드슨 테일러, 로이드존스, 사무엘세즈윅, 존 라일, 무디 등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기나 저서를 보면 그들이 회심한 증거들로 가득합니다.
칼빈에게 회심은 곧 회개였으며, 이는 단지 내면적 슬픔만이 아니라 옛 본성을 벗어버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는 것을 뜻했다.
어떻게 하면 회심케 할까?
어린 시절, 교회를 나가면 늘 울음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회개하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눈물 흫리며 기도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대표기도자가 울고, 회중도 울고,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케 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피아노가 없고, 낡은 풍금에 마추어 찬양을 뜨겁게 부르면서 울었고,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언제나 교회 안에는 비회심자들이 있습니다(마 13:26, 요 6:70, 딤전 1:20).
많은 신자들이 회심하지 않았는데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의 일꾼이 되고, 빨리 직분자가 되려고 합니다.
점차 부흥을 주시는 은혜의 예배는 사라지고 무미건조하게 눈을 즐기도록 만들어 주는 요소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회심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드는 눈에 보이는 분명한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가치판단이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그들에게는 신령한 것들에 대한 참된 감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리를 기뻐하지도 않는다.
셋째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 곧 거룩한 정서가 없다.
오히려 자연적인 본성이 변화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넷째로,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께 굴복치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외적 교회생활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삶에 있어서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다.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그리고 거룩한 은혜의 수단들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과 회심이 없이 구원이 없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특징을 비록 더딜지라도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또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대면하는 즐거움을 사모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거룩함’(holiness)을 추구합니다. (존 라일의 '거룩')
하나님의 임재와 대면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거룩을 추구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신자는 바울의 말처럼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포기하고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기를" 사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며, 십자가에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의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롬 6:11).
이 것이 거듭난 자의 사명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는 삶입니다.
우리의 심장을 주님께 드려서 얻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