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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同病相憐)

[明泉] 맑은 샘물 2024. 7. 7. 20:39

동병상련
누구에게나 드러내어 말하기 쉽지 않은 아픈 상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자기와 같이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녀 역시 오랜 세월 말 못할 뼈아픈 상처를 가지고 힘겹게 보내야만 했었다.
그 아픔과 상처, 그리고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동병상련이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돕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입은 치유자
우리에게는 나라를 잃었던 고통과 처참했던 6.25 전쟁, 가난, 고아들.... 이같은 상처가 있었다.
누가 우리들이 가졌던 그 아픔을 보듬어 주고, 이해하며 위로해 주었던가?
우리에게는 '펄벅'으로 알려진 여성 작가였다. 푸른 눈을 가진 여인, 우리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그녀였다. 그녀의 본명은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년 6월 26일 ∼ 1973년 3월 6일). 그녀가 1931년 장편소설 [대지(大地)]를 출간하여 1938년 미국에서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녀는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어린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고, 대학을 다니기 위해 4년을 미국에 머물렀다. 그리고 졸업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고, 예쁜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첫째였던 큰 딸이 지적장애아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말 못할 손톱밑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아픔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재혼을 하였고, 소설을 쓰게 된다. 유일한(유한양행 설립자)과 인연이 되어 한국을 이해하고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러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그녀는  스스로 박진주(朴眞珠)라는 한국어 이름도 지었다. 
그녀에게 아픈 손가락처럼 말 못할 고통이 있었다.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이 지적 장애인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장애인 딸을 위해 어머니로서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던 가운데, 딸로 인하여 그녀는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등을 경험하면서《평화를 위한 집필과 사회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살아있는 갈대)》
그녀는 펄 벅 재단을 설립,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태어난 사생아 입양 알선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쓴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살아있는 갈대)》는 서양인의 눈으로 보았던 1881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말까지의 구한말과 한국 상류 가정의 변천을 묘사하고 있다.
1964년에 사회복지법인 한국펄벅재단을 설립하였고, 1967년 한국 경기도 부천 소사에 보호자가 없는 혼혈 아동과 일반 아동을 위한 복지시설 '소사 희망원'을 건립한 바 있다.
1968년에는 한국 혼혈아를 소재로 《새해 The New Year》를 출간하였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2006년 펄 벅 기념관이 부천시에 개관되었다.
펄벅여사의 한국 문화와 농촌체험기에 관하여
http://m.gjnews.com/view.php?idx=72011

[경주신문] 오징어게임보다 강렬한 펄벅의 경주 체험담

경주 사람이 공유하고 널리 알리고 싶어 할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장편소설 <대지>(大地)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탄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선생의 경주 방문기이다. 1960년 가을, 한

m.gjnews.com

그녀의 한국사랑에 대한 일화
https://www.daddyprogrammer.org/good-writings/?vid=80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의 통치를 일본에게 넘기는걸 반대한 펄벅 여사

펄벅 여사(Pearl S. Buck) 1892년 6월 26일 ∼ 1973년 3월 6일 (80세)미국의 소설가.한국명 박진주 ( Perl은 진주, Buck은 박 씨로 바꿈 )실제로 그녀가 한국에 방문했을때 스스로 박진주라는 이름을 지어서

www.daddyprogrammer.org

펄벅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에 대한 캐네디 대통령의 오해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https://m.mk.co.kr/amp/6738581

[장경덕 칼럼] 펄 벅은 이렇게 말했다 - 매일경제

1962년 4월 30일 백악관에서 화려한 만찬이 열렸다. 노벨상 수상자 49명이 주인공이었다. `대지`의 작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탄 펄 벅은 케네디 대통령과 아시아 문제에 관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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