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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 참된 나(2)

[明泉] 맑은 샘물 2024. 1. 13. 08:51


솔직(率直)이든 정직(正直)이든 사람이 실천하기에 참으로 버거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의 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 있게 '나는 정직하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솔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치부터 살핍니다.
눈치는 두 살 되기 전부터 생기는 습관입니다.
말은 못 해도 자기가 잘못인지 아닌지 양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눈치 보기에 본능적으로 발달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신에 유불리를 따집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불이익이나 손해를 먼저 계산해 봅니다.
그에 따라서 때로 입을 다물거나 어물쩡 넘기기도 하고,
때로 말을 바꾸기도 하고 변명이나 핑계로 자기 회피를 합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하나님께서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한 짓을 숨기려 했습니다.
종종 계산된 솔직함으로 위장하여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저(베드로)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충동적인 성격으로 이미 앞서서 주와 함께 죽겠습니다(요 13:37)
잘 관찰해 보면, 자신이 정직하다거나 "나 솔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서 솔직함이지 그의 양심으로 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치가 매우 빠르고 발달해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솔직하다고 믿게 됩니다.


"솔직(○)하지만, 정직(●) 하지 않은" 경우
솔직과 정직의 문제는 정의에로까지 나아갑니다.
직장에서 동료의 잘못을 지적하든, 사회적 부정에 대해서 비판을 하든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직(正直) 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면 그 지적과 비판 자체는 타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상대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때로는 상대에 대한 비방이나 자기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자신이 속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관행이나 잘못된 제도나 현실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솔직한 것 같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 기준에서 판단한 것이므로 공정하고나 객관적일 수는 없습니다. 주관적인 자기 생각이 반드시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와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비판이나 지적하는  동기가 바르고 방법이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 '소년시대' 캡처

정직한 사람

드물지만, 양심이 바르고 마음이 굳건해서 자기감정을 싣지 않고, 또 자신의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을 보면 참 부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나 비판들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무언가 '그래 맞아, 저래야 사람이지'라는 울림이 있습니다.
비록 그 자리에서 당장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의 말에 거부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는  경우를 봅니다.
이처럼 정직은 사심(私心)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사심이 없기에 비판의 동기가 깨끗합니다. 
또한 비판의 방법도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사심이 없기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닙니다.
'데미안'이 그랬습니다.

도덕성이 흘러가는 통로
정직하다는 일관성을 가질 때에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따로, 생각하는 것과 말이 따로, 말과 행동이 제각기 따로 이기에  정직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정(正)은 물론이고 직(直)을 입에 담기도 어렵습니다.
정직, 진실, 솔직함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과 대면하여 풀어야 할 평생의 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진실을 알기에

사람은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조차도 못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그분 앞에 설 때를" 생각하고, 수시로 그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분과 마주할 때 내가 보이고, 나의 이 무너질 육신의 장막 안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없이 나약한 인간, 자기 변명으로 가득 찬 인간, 이기심이로 똘똘 뭉친 사악한 늑대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길들여 착한 개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인생이라는 것을, 그렇게 잘 길들여질 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은 때에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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