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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三位一體)와 여호와를 아십니까?

[明泉] 맑은 샘물 2023. 12. 30. 18:50

하나님의 신비, 그의 이름과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는 숨겨진 비밀이다.  

하지만, 아들을 보내어 아버지를 계시하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을 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는 보내신 자, 보냄 받은 아들과 함께 '여호와'라고 부르라고 자신을 알려 주셨다.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Trinitas, 라틴어 트리니타스)

기독교에서 이보다 중요한 교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이 단어를 제대로 설명한 책이 없다.

하나님에 관한 "삼위일체론"이 정립된 것은 이단들 때문이다. 초대교회 이후로 영지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본래 성경이 증언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공교회가 올바른 신앙(교의, 敎義)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신조로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교부들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기초를 놓은 인물들은 동방교회의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다. 서방교회에서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d. 430)이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성부는 물론, 성자와 성령을 포함하는 세 위격들 모두의 신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구별되는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신성을 가진 구별되는 세 개별적 실체가 하나님의 한 본질을 공유하며(mia ousia, treis hypostaseis), 또한 서로가 서로 안에(상호내주) 온전히 내주하신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체성을 설명하였다 (삼위일체).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어 전파되면서 그중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의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하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의 교회를 서방교회라고 부른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330-379),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329-389), 닛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 c.335-c.395)를 가리킨다. 나중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의 해석을 기초로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 혹은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확정 지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르는데, 먼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그 한 하나님 안에 서로 구별되면서 동등한 세 위격의 복수적 관계가 존재함을 설명하려고 하였다(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일체 삼위).

"삼위일체라는 것은 하나님 셋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말도 아니다.

하나이신 하나님께 세 위가 계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신앙교육을 위한 신앙고백서들에 모두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서 자세하게 이 교리를 다루고 있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13. 성경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삼위일체(Triune God)로서 한 본질 안에 삼위(three person)가 계신다고 가르친다.

 위(位, prosopa)라는 말은 성경에 없지만, 성경은 성자를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 칭하고, 성부와 구별되는 실제(Subsistence)로 말한다.
이는 성부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구별되시나 성자 안에서 완전히 표현하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그의 본체를 나타내셨으며, 
이는 성령의 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구별된다. 

그러므로 삼위는 세 실제, 즉 본체(hyphostasis)로 계시나, 세 분이 아닌 한 동일본질(homoousios, consubstantia)이 되신다.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의 "실재(subsistence)를 뜻하며, 다른 두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전달할 수 없는 특성으로 구별된다.
여기서 "실재"는 "본질"(essence)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재는 "관계"라는 말은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비교되자마자 양자는 고유한 특성에 의해 서로를 구별된다.
그리고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무엇이든 서로 전달할 수 없다. 
이는 성부를 구별짓는 특징에 속한 것은 어느 것도 성자와 일치하거나 옮길 수가 없다. 
터툴리안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distribution)나 경륜(economy)이 있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4~6문,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8~11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장, 벨지카 신앙고백서 8~9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4~25문 등에서 설명하고 있다. 

세 본체를 지니신 한 본질이라고 하지 않고 세 위격을 지니신 한 본질이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위격이란 단어가 그리스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히포스타시스는 위격이라 번역되는데 그 의미는 ‘특성’이다. 라틴어 본체 또는 그리스어 인격이란 단어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어 위격이란 단어는 성경적 용어이다. 성경에선 ‘실상’(히 11:1)과 ‘본체’(히 1:3)이라 표현되어 있다. 위격이란 말이 특성이란 뜻이 있으니 삼위 하나님은 세 특성을 지니신 분으로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고 말해야 한다.

 

삼 위격의 한 분 하나님

1. 성부와 성자의 구별

1)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성자를 가리키는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하였으니 하나님과 말씀이신 성자는 구별된다.

2)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막 15:34), 버리시는 이와 버림받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2. 성부와 성령의 구별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할 때(롬 8:26-27), 기도하는 이와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부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할 때(요 14:26), 보내시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3. 성자와 성령의 구별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할 때(요 16:7), 보내시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가 구별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칼빈의 설명은 이렇다.
1) 우리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구분된다>고 해선 안 된다. 

구분이란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칼빈은 강조한다(1권 13장 17항).
간단히 말해서 삼위 하나님은 한 (동일 또는 동등하신) 본질이시다.

그러나, <구별>된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2) 구별된 세 위격의 각각의 특성은 무엇인가?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않으시고 나오시지 않으신 분’이시다.

성자는 ‘영원토록 성부에게서 나신 분’이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토록 나오시는 분’이다.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던 한자로 번역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다 보니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몸을 나타내는 단어들 

신체(身體)-마음을 듣는 몸 

몸을 뜻하는 한자로는 身(몸 신)이 있다.

몸신은 무엇을 강조하는가? 신체(身體), 인체(人體), 육체(肉體), 육신(肉身)이라고 쓴다.

한자로 身은 금문(金文)에서는 임신해서 볼록해진 배가 나온 모습을 그렸었다.

이때 뱃속에 잉태된 생명의 상징으로 점을 넣기도 했다.  
이처럼 身은 ‘임신하다’가 원래 뜻이다.

이제 막 임신 초기의 모습으로, 이후로 점차 사지백체 오장육부가 만들어져 간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身, 躬也. 象人之形”이라고 했다.

즉,  身이 사람의 모습, 즉 몸을 그린 것이다.

 身은 어떤 일을 한 주체를 일컫는데, 자기가 한 일을 ‘자신이 몸소 했다’는 의미로 쓰였다.

身은 철저하게 육체의 몸과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身은 새 생명을 잉태한 몸, 혹은 나 자신의 몸, 곧 나를 가리킨다.

생명이라는 존재 자체이면서 또한 인격적 실체를 포함한다. 
우리들이 보통 ‘신체(體)’라는 한자어를 사용하는데,

體(체)는 주로 신체의 뼈骨(골)들이 많다 뜻의 한자 豊(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뼈를 갖추고 있는 몸을 형상화한 것이다.

肉(육)을 사용하면 고깃덩어리 곧 살로 이뤄진 몸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하나님을 알게하는 의미로 전달할 때 왜 體(체)를 썼을까?

體(체)는 肉(육)과 身(신)관 구별된다.

뼈로서 숨겨진 부분, 속성을 나타낼 때도 쓰인다. 

살은 외형과 모양을 보여준다. 하지만, 뼈는 숨겨져 있어 다르다.

보여줄 수 없어 엑스레이를 찍어야 볼 수 있다. 

속에 있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뼈가 있다는 것이다. 동일하게 206개이다.

성인이 되면 두개골 22개, 설골 1개, 척추골 26개, 귀의 이소골 6개, 흉골 1개,

늑골 24개(12쌍), 상지골 64개(32쌍), 하지골 62개(31쌍) 등 모두 206개의 뼈로 구성된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누구나 206개를 가지고 있다. 

體(체)는 이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이다. 

삼위가 하나(= 같은, 동일한>의 본질이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삼위일체는 본래는 삼위일신의 의미이다. 

한자로 體(체)는 단순히 몸(身= 몸과 생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肉(육) 살아 있던 죽어 있든 고깃덩어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體(체) 보이지 않는 몸을 구성하는 속성 곧 본질을 의미한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일체는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한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머리에서 이상한 하나님의 형상을 상상하게 된다.

차라리 삼위일체보다는 <삼위일신>이 본래의 뜻에 더 가깝다.

풀어쓰면 삼위는 동일한 신이다.

신성이 동일한 인격을 가진 세 분이란 뜻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없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 없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누군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누가 그분에게 이름을 붙여줄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나이다 = 여호와(야웨, 야훼)라고 하신 것이다. 

여호와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 설명한 단어일 뿐이다. 

제 3계명에 "너희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亡靈)되이'  부르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신5:11; 출20:7).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가르치신다.

 * 히브리어 '샤베'로 '무익한, 헛된, 거짓된, 가벼운, 경솔한'

단, 함부로, 소홀히, 생각없이 라는 의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記念 稱號)니라

이사야 52장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이사야 43장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시편 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우리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칭호는 이렇게 세 가지이다. 훗날 '주'(아도나이를 넣어서 읽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사 42:8).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 하시니이다”(시 135:13).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시 9: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예를들면 우리들이 부르는 호칭이 "세종대왕"이다. 이름인가 호칭인가?

호칭, 또 칭호이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 

세종[世宗] 세종(世宗, 1397년~1450/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국왕이다.

이름은 도(裪 : 옷소매 도, 복 도)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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