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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데미안', 그대는 헤세의 정신적 '혼돈' 의 자식이었구나

[明泉] 맑은 샘물 2023. 12. 26. 11:22

여러분도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의 ‘데미안(Demian)’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는 1946년 20세기의 문명 비평서 라고 할 미래 소설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에 괴테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작가입니다.

• 1차세계대전(1914. 7. 28 ~ 1918. 11. 11)은 유럽을 중심으로 피바다를 만든 전쟁. 1919년 베르샤유 조약에서, 승전국(미국, 영국, 프랑스 및 기타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에 대해 징벌적인 영토, 군사 및 경제 제제 조항을 시행했다.

1919년 발표된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젊은이들에게 폭풍적 인기를 누렸던 성경처럼 읽혀다던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다들 데미안에서 명언처럼 기억하고 메모했던 문장이 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은 아브락사스다."
몇 번을 읽어도 알듯 모를듯 아리송한 이 구절은 읽는 독자에게 스스로가 그 의미를 찾아 가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새>로 상징하는 모든 인간은 그 시대의 틀 안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 시대의 아들로 태어나 시대 안에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소수만이 그 틀을 깨고 나아가려 몸부림칩니다.
거기서 나가기 위해 투쟁과 몸부림으로 현재에 안주시키려는 것을 파괴해야만 나아갈 수 있다고.
그것을 때로 두려워 하고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현재 세계보다 더 찬란한 자유와 희망으로 가득한 환희의 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깨뜨리라고 말합니다.
그(인간)가 찾아 가고자 그토록 몸부림치며 희망했던 그 신은
아프락사스(Abraxas)입니다.
아프락사스는 어떤 신입니까?
아브락사스(Abraxas)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신입니다. 아니 선과 악을 다 지녔다기보다는 완전한 선과 악을 흐릿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런 세계를 지향하지만, 인간의 본성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헙니다.
양쪽 모두이면서 그 이상이었다.
최고의 선이자 극한의 악이었다.’

헤세는 싱클레어를 통해 선이면서 악인데, 그보다 더 나가버린... 그래서 최고의 선과 극한의 악이라고 말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너 자신 안에 갇혀있는 세계를 탈출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려한 것입니다.
이 말은 저자인 헤세가 자신이 갇혀 있는 세계관, 그 시대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가 만든 액자문학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제시하는 틀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단계 전진한 것 같으나 또 다른 틀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셨습니까?

왜 이 문장을 읽는 독자마다 각각의 해석이 다릅니까?
먼저는 헤세가 어디에서 이러한 사상을 가져왔는지를 독자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독자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말한 "아프락사스(Abraxas)"에게로 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헤세의 《영지주의 사상》을 배경에 깔고 있습니다.
헤세가 데미안을 '영지주의'적 관점과 사고로 썼기 때문에 뭔가 신비한 것 같고, 몽환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매력적인듯, 매혹적인 듯, 그러면서도 무언가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갖게 됩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의도로 썼기에 데미안은 우리에게는 아리송하고, 무언가 신비로움을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인간이 태어나 그 시대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벗어나게 해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또한 헤세의 데미안에는 《니체 사상》도 녹아져 있습니다. 니체 역시 동양의 신비주의를 통해 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기를 주체로 삼는 세계관을 구축했던 인물입니다.
인간은 분명한 것은 '무지, 어리석음, 어둠'에 갇혀 있고, 시대의 굴레라는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괴짜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들을 깨고 나오려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데카르트가 말한 굴레 곧 '네 가지 우상(The Four Idols)'의 껍질에 덮여 있습니다.
'우상'(偶像)은 자기에게 충실한 자들에게는 많은 선물을 안겨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으로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 어둠'이라는 세계와 밖으로는 세상의 허구적 사조들로 둘러싸여 그 시대의 사람으로 묶이고, 거기에 매여 살아가게 됩니다.
헤세는 자신도 그러했고, 또 그 시대의 고뇌하는 젊은이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 알을 깨고 나와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했습니다. 참으로 칭찬할 만한 사고입니다.
그것이 데미안이지만, 그에게도 그의 시대적 한계가 있었고, 그 틀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데미안입니다.
그는  "아프락사스(Abraxas)"에게로 이끌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자기에게 금지된 것을 제 자신의 힘으로 찾아내야 하는 거야. (….) 이제 나는 교회가 아니라 아주 다른 것에, 즉 사상과 개성의 교단에 입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문예출판사, 헤세, <데미안>, 88p

여기서 그의 세계로 가는 방법을 《영지주의》에서 찾았다는 알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데미안의 배경에는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독자들이 데미안을 읽다 보니 여러 번 읽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영지주의는 A.D 1세기에 상당히 영향력을 끼친 동방의 신비종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일종의 사이비 종교였습니다.
영지주의자은 그들만이 신비적이고 직접적으로 신과 연합을 통해 직통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밀교적인 지식을 얻어야《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광신교도들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교회사에도 면면히 남아 있습니다.
헤세의 소설의 주인공인 《데미안》은 데몬(demon)에서 유래한 뜻으로 ‘악마에 홀린 것’이라는 뜻이라는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헤세가 정신적으로 우울증이 심각하여 입원했을 때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칼 융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칼 융은  ‘죽은 자들에게 주어진 일곱 강의들’이라는 짧은 영지주의적인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책을 읽던지 왜 저자는 이런 표현을 썼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의 정신세계, 곧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배후들을 이해가 필요한 것이지요.
저는 데미안이 신학을 공부할 당시 유럽은 격동기이면서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계몽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니체의 동양철학의 신비가 섞여 있습니다.
그 시대는 마치 신을 버려야 학문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지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시대에는 그들의 사고와 사상에서 신을 죽임으로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들이 선각자로 인정받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면 조금은 그 시대의 책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학자들조차도 거기에 편승하여, 신학자들 중 건전한 신앙을 가진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 예배하는 것이 그 당시 신학자들에게는 마치 신비한 사람(아직도 너 신을 믿니?)처럼 보였으니까요.


우리에게는 분명 선각자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전도자(진리를 전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여전히 해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자전적이면서 그 시대의 정신적 혼돈 속에 탄생했습니다.
그 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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