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담긴 의미
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성경에 기록하면서 “구유를 표적으로 남기셨나?"
이 사실을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영원히 증거 하게 하셨을까?
이 아름다운 전통을 절대 손상시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언제나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하나님의 표적을 구유에 담으셨나?
그 표적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놀라운 표징」(Admirabile signum)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를
구유통과 일치시키셨다.
도대체 구유는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이토록 울림과 감동을 자아내는가!
구유, 가장 비천한 낮은 음자리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셔도 이같이 낮아지실 수 없다.
구유는 인간이 타락으로 내려간 비참한 자리이다.
가장 낮은 자리, 짐승의 여물통,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내려간 자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찌보면 짐승만도 못한 처지에 나락으로 내려갔다.
시편기자는 자신을 벌레 만도 못하고, 짐승만도 못하다고 표현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구유이다.
그런데, 그유는 짐승을 먹이는 먹이통이 아니던가?
예수는 그곳에 누어 우리를 보고 계신다.
우리는 그곳에 누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계신 것이다.
거기에 내려 오셨다. 비참함을 짊어지려고 오셨다.
우리는 구유에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는 가장 낮은 자리이다.
구유도, 십자가도 나무로 만든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가?
구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선교지
구유는 우리의 선교지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얼마나 높이 올리셨나?
그토록 높아진 것은 그리스도가 낮아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낮아져야 할 곳이 바로 구유이다.
거기에 있는 낮은 자들,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무시받고 상처받고 고통받는 자들을
우리는 예수를 소개하므로써 그들을 치유하고 안아주고 상처를 싸매어 줄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구유에 까지 낮아지셨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낮아질 수 있다.
단순히 성탄의 기쁨에 젖어 감상에 빠지지 말자.
도리어 이 놀랍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성탄의 장면"을 묵상하고 관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여정이어야 한다.
이 땅에 처참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셨다.
자신이 베들레헴(떡집)처럼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오셨다.
우리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생명의 떡으로 오셨고, 생명의 떡을 주시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성탄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우리도 천사들이 전해 준 소식을 따라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로 나아가자.
우리가 가야할 마구간은 각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계신 주님을 분명히 만날 것이다.
그 구유가 있는 곳은 우리의 일터 일터일 수 있다.
어떤 이는 직장이고, 배우는 학생은 학교이고,
어떤 이는 병원이고, 어떤 이는 방황하다 죄를 짓고 들어간 구치소나 감옥일 수 있다.
또 어떠 이에게는 광장일 수 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탄생하신 구유를 보여 주어야 한다.
구유는 복음의 원시림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내 안에 구유가 있는 사람 만이,
오셔서 내 안에 누인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만이,
구유를 자랑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여물통(mangiatoia)”에 누이신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참함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경악하며 몸서리칠 것이다.
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날 위해 그런 놀라운 일을 하셔야 했냐고.
당신에게 하늘의 양식을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주시려고 그분이 그렇게 낮고 천한 곳에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아이가 되신 하느님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동
구유는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낮은음 자리표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구유가 필요 없는 자는 없다.
“우리을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오신 주님”,
친히 가난한 자가 되셔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애정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경이롭고 감동을 자아낸다.
이 세상 모든 형제자매들 안에 하나님의 이 놀라운 자비하심을 알도록
그들도 주님을 만나도록
우리가 그들을 섬기도록 주님은 먼저 우리를 초대하신다.
"구유의 표징,
그리고
고요함 가운데 별들이 빛나고 있다.
우리도 성탄의 밤에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오심을 관상하자.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밤이다.
구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야기 보따리
그래서,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그분께서는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주시고,
고통의 어둠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요셉과 마리아,
동방의 박사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그 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의 이야기는
아기 예수로 가득 채웠고,
장치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지치고 피곤했던 여행길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긴 여정을 인도했던 별의 이야기
아기 예수 이야기로 꽃을 피웠을 것이다.
들에 양을 치던 목자들도
이곳저곳으로 양을 치러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였을 것이다.
구유, 거기에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구유(여물통) 안에 아기 예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시므온이, 안나가 예수님을 안았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품에 안고
그분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따라 가자.
우리가 구유에 담긴 사랑이 없이는 십자가의 사랑에로 나아갈 수 없다.
구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깊고 깊은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의 십자가 앞에서 울 수 있고,
그 십자가를 부둥켜안을 수 있다.
구유, 그 이야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동방박사들, 멀리 있는 이들과 신앙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을 때 동방박사들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조금은 실망스럽지 않았을까
그러나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그들에게 천사들이 전해 준 소식을 전하는 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마리아도 놀라고,
더구나 요셉은 더 놀라지 않았을까.
그렇다, 성탄은 놀라움으로 시작하여 놀라움을 끝을 맺는다.
끝으로, 마지막 표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다시, 그 행복 속으로
구유는 우리에게 깊고 오묘한 신앙을 전달해 주는 감미로운 낮은음 자리의 소리이다.
중요한 것은 구유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아기로 탄생하시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영원히 임미누엘 해주시는 분이 되셨다.
구유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리고 우리와 얼마나 당신이 가까이 계시는지를 말씀해주시고 계신다.
구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 위로, 격려를 보여주시는 편지이다.
구유를 통해 “너희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단다”라고 말씀하신다.
매년 돌아오는 성탄이지만, 그 행복한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올해도 나는 그 구유에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나아가
거기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께 나아가
그분의 얼굴을 뵈옵고
밤하늘의 별들의 노래와
천사들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동방박사들의 별을 따라온 이야기와
양을 치던 목자들의 헐떡이며 달려와 숨을 몰아 쉬며
들려주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잔잔한 웃음꽃이 가득한 요셉의 얼굴과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소식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