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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의미 -"구유에 담긴 표징", 이것이 성탄이다.

[明泉] 맑은 샘물 2023. 12. 23. 15:17

왜 하필이면 구유인가요.

성경은 예수님 탄생의 일화를 매우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로마 가이사 아구스도(카이스라 아우구스트)의 호적을 각 출생지에 가서 하라는 명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인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을 때 만삭의 몸이었다. 

    눅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머물 여관을 얻지 못하고 한 가난한 집에 들어가 출산을 하게 되는데,

"아기를 포대기(강보)에 쌓아 구유에 누였다(눅2:7) 라고 전하고 있다.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리고 들에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서

"너희는 빨리 성으로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그것이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표징(2:12)이라고 말한다.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기가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인 것을 표징으로 삼으셨을까?

또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비위생적인 짐승의 구유(여물통)에 누였을까?

  우리들이 이해할 것은 당시 가옥구조와 짐승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아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난방이 잘 되고, 각각의 방들이 있는 가정은 매우 귀족들이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우 가난한 집은 안방이 별도로 있지 않았다. 부억도, 그리고 짐승의 우리도 따로 있지 않았다.  

  우리들 시골에 부엌과 안방 사이의 벽이 없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생각하면 된다. 또 부엌 맞은편은 짐승의 우리였다. 

  가난한 집의 그들은 짐승을 마치 가족처럼 여겼다. 도둑을 맞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http://champyungan.com/blog/archives/4920

 

   

이것이 성탄이다.

오늘날 성탄절은 화려하고 교회마다 행사들로 즐거움을 가득합니다.

세상에서는 백화점이나 연인들에게 연중 최고의 대목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성탄절은 매우 초라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위대하신 하나님이 겨우 달랑 동방박사 세 사람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몇 명의 목자들,

그리고 가난한 한 가정의 가족들,

그리고 방이 별도로 없는 방과 부엌 그리고 맞은편에 마구간이 함께 한 초라한 집이 전부였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성탄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데 충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세상사람들이 관심도 갖지 않을 방법을 선택하셨을까? 

오~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이야기로 아주 시시하게 시작되었다.

온 세상 그 누구에게도 흠모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마구간 구유에 누여야만 했던 사건에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성탄절이요, 이것이 계시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는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1. 구유에 담긴 메시지

히브리어  '에부스'(אבוס, 'ebus- 잠 14:4), 아바스(H75: 먹이다, 살찌우다)에서 유래

'구유, 여물통, 외양간, 마구간'  

욥 39:9, '외양간, 축사'

잠 14:4, '꼴을 두는 곳, 외양간, 여물통' :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사 1:3, '구유나 여물통' 

참고, 에노쉬( H583: אֱנוֹשׁ 명남)는 '사람, 인간'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헬라어로는 '파트네'( Φατνη, phatne- 눅 2:7)라고 하는데

이는 소나 말, 나귀의 여물통이나 외양간을 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세상에 보내실 때

모두가 학수고대하고

마치 새해 일출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 앞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전 세계가 생중계하는 월드컵 결승을 치르는 경기장처럼,

올림픽 경기장의 메인스타디움에서 마지막 휘날레처럼 

그렇게 매우 영광스럽고 기대가 가득한 기다림과 준비 속에

그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하실 수 없었던가?

 

그런데,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이미 선지자들이 그분의 탄생이 어떠한지를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건이 너무 시시하고 아무리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려던 계획이고 방법이었습니다.

믿을 사람들에게는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라던

천사들의 찬송소리처럼,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실 평화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나님은 그러한 일조차도 시시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놀랍고도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영광스러운 보좌를 뒤로 하시고 우리와 대화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과 나, 우리와 인격적 관계, 교육적 관계, 생명적 관계의 다리를 놓으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셔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의 뜻이 놀라운 것이지요.

존재와 인격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가난한 집에 찾아오셨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들의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저 멀리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찬문학자인 고급 무당이라고 취급받던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세상에 아기로, 사람으로, 아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하고 떠들썩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잔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신 것이 중요합니다.

 

왜 사람으로 오셨나? 

 

첫째는,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

히브리서 2: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둘째는, 우리와 함께 고난을 맞보시고 도우시기 위함

히브리서 4:15 절하, '그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시험을 체휼(體恤)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온갖 고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아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잘 아십니다.

또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기에 도우실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나도 아파서 알아!" 이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억울한 사람에게, 절망과 고통, 배신을 당해본 사람에게, 파산을 당해보고, 온몸이 찢긴 아픔을 겪어 보신 분이기에 우리를 아십니다(히 2:18, 4:15, 5:2,7). 

이사야 52:3, "우리의 질고(疾苦 : 병으로 인한 괴로움)를 지고" 우리가 질병으로 당할 수 있는 고통들을 지셨습니다. 

 

셋째는,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함께 하심 

요한복음 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정치적으로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시고, 경제적으로도 무거운 세금과 착취, 극심한 고난과 강도들이 들끓던 사회였습니다. 종교는 썩을 대로 썩었고, 부패하고, 패려하고, 악습이 흘러넘쳤습니다.

당시의 헤롯이 지은 성전은 단지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본다면 그저 화려한 건물일 뿐, 아무것도 아니지요.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가정에 엄청나게 많은 동생들, 대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한낱 목수의 맏아들이셨습니다.

태어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였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머리 둘 곳이 없는 나그네 같은 삶,

마지막 그 십자가의 길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난을 맛보셨고,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기 백성은 그를 환영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목적, 이익을 가져올 수단으로 맞이했을 뿐입니다.

마지막은 제자들도 모두가 배신하고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러한 그분이 가신 그 길을 그 누구가 함께 해 주었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

고통과 슬픔으로 가슴이 찢기고

상처로 얼룩지고 고통받는 자들,

뒤돌아 홀로 배신에 눈물 흘리는 그들에게

은밀하게 찾아오십니다.

사실 우리에게 성탄은 가장 큰 기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아픔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픔의 표현이다."(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성탄(聖誕)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2천 년 전 첫 번째 성탄절 "말구유 사건"은 이처럼 귀한 뜻으로, 이같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탄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려고 세상에 왔단다!

네가 나를 맞아 줄 수 있겠니

너의 안방이 아니어도 괜찮아. 나와 함께 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것이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이야."

이것이 곧 나의 신앙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2천 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오늘 내 안에 그분이 오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2. 천사들을 통해 전해 주는 메시지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무엇입니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이 말에는 무엇이 담긴 성탄의 메시지입니까? 

"하늘에는 영광"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성탄절이 되면 촛불 켜 놓습니다. 물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지요.

왜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 하늘에 영광입니까?

히브리어 카보드(영광)가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바꾸면 "칭찬"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탄절은 우리들이 서로 즐거워할 성탄이 아닙니다.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 곧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까?

내가 성공했을 때입니까, 내가 실패했을 때입니까? 행복할 때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이 의미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고난을 당하러 오셨다는 것, 죽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하신 분이 고난과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다 나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 내 죄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임마누엘(하나님이 나(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니

이 세상에 아무리 극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그 모든 고통을 모두 참고 끝내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승리할 때 그때에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견딜 수 없지만,

나의 예수님 때문에, 날 위해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시고, 대신해서 죽으신 그분 때에

내가 그의 이름으로 참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누가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돌 맞아 죽으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 말을 하고,

천사의 얼굴로 원수를 용서하던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한 탄생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날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역경 중에도

신앙을 고수하는 견고한 그 믿음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는 말은 곧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말구유에 누이셨던 이유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보시고 아파하시고 눈물흘리 시던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이 땅에 오셨기에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못하셔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하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나라도 시쳇말로 '화끈하게' 폭력을 써서 혁명을 일으켜 뒤집습니다. 

파업으로 회사를 뒤집고, 전쟁으로 나라를 뒤집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 죽고 나 죽고를 통해서 만드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매우 조용하게 시작하셨습니다.

아니 은밀하게 그리고 모두가 침묵하던 그 밤에,

유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한 아기"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성장하시고,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적어도 30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온 것은 아기를 보러 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기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분을 천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메시아를 알고 경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기 예수를 본 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적어도 30년은 지나서야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 아닙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화끈하게 뭔가 일을 뒤집어 주시는 혁명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자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이처럼 조용히 시작됩니다.

물론 변화되기 이전의 유대교에 특심하던 바울은 화끈하게 예수를 만납니다.

굉장한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장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 놈, 쳐 죽일 놈, 아니 배신을 해, 이단자야! 당장 죽여라."

결국 그는 도망합니다.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

아라비아(사우디)로 가서 3년 동안 기도를 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데,

그 전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까?

아직도 이전의 사울이 살아있습니다. 그래도 안 바뀐 게 있더라는 것이지요.

아덴 전도에서 철학으로 전도를 하는데 실패하고,

고린도로 건너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귀한 진리를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말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오묘하신가!

내가 당한 이 고난, 내가 겪는 이 고생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 바라노라.'

구원이 순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화(聖化) 되는 것은 일생을 통해서입니다.

한 생명이 성장하듯 긴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왜 하필이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 하셨는가?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성탄(메시아 탄생)의 표적으로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라고 하셨는지

다시 한번 명심합시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를 경배합니다.

그 아기의 손바닥에 "메시아, 구세주"라고 하는 표징이 있습니까?

얼굴에 모세처럼 "광채"가 났습니까?

무슨 특별한 황금 면류관을 쓰고 태어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이심을 알아보았을까요?

"베들레헴 성 중에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너희 구주가 나셨느니라."

이 것이 표적(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거)이래요.

하기야 그렇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말 구유에 강보에 쌓아 뉘어 놓은 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일은 최초이고 마지막 일 것입니다.

예수님뿐일 것입니다. 

(훗날 누군가 그렇게 해 보지 않은 이상 없을 것입니다.)

말구유가 예수님의 표징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여러분, 어느 때에 참사랑이 있습니까? 어느 때가 가장 진실합니까?

말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고 저 미물의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겸손이 있어야, 저 마구간까지 내려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유(여물통, Crib, Manger)가  바로 그 표적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 진실한 구유가 마련될 때에야 거기서 예수님은 탄생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구유같이 마음을 비워놓고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계시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탄 전야 발표회가 되면 교회마다 가장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송, 무용, 노래, 연극 등을 했습니다.

연극이라 주제가 늘 똑같습니다. 아이들만 매년 바뀔 뿐입니다.

제가 하던 것을 이제는 아들이 하고, 이젠 손주가 할 것입니다.  

등장인물은 언제나 "천사, 마리아, 말구유……" 등입니다.

여자 어린이들은 마리아 되어 보는 것이 소원이고,

또 어떤 아이들은 서로가 천사를 맡게 해 달라고 서로가 조릅니다.

 

오래전 「가이드포스트」지(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져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에 2학년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키도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 역을 맡겼습니다.

아이가 집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딱 한 마디 "방 없어요" 하고 들어가 버리는 역이었지요.

이 한 마디를 위해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드디어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 데서도 안 받아줍니다.

부탁합니다."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딴 데나 가 봐요!" 하고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 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순간, 관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처럼 뜻깊은 성탄 연극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안 방>을 이 땅에 오신 주님께 내어드립시다.

내 가장 소중한 그 방, <마음의 방>을 내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궁에 못 오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냄새나는 <말구유>를 선택하셨습니다.

왜, 하필 말구유인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셨습니다.

비록 떠들썩한 환영 속에 탄생하시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역사,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구유에서 시작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구유에 누이시 표적으로 원대한 구원의 역사를 완성 짓는 일을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 시간 말구유처럼 하나님의 표적이 일어나는 곳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당신의 아들이 탄생하시도록 역사하여 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안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말구유의 신비를 경험하시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것이 구유에 탄생하신 성탄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하라. 만일 당신이 이것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노래하겠는가?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의 탄생의 중심점은 베들레헴의 구유에 있다.  - 랄프 W. 쇼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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