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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보여주는 그림언어

[明泉] 맑은 샘물 2023. 12. 22. 11:19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 문태준 (1970~)

눈보라,
말만 들어도
누구나 한 번쯤
잊지 못할 경험이 있다.

1980년 겨울,
고등학교 입시가 있던 그날,
하필이면
꼭두새벽부터 폭설이 내렸다.

맏형은 아끼던 장화를
부뚜막에 올려
따뜻하게 하고는
시험을 보러가는
동생에게 내어 놓는다.

매서운 칼바람에 맞서서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한걸음, 또 한걸음
버스가 오는 길 정류장까지.

신작로 길이지만
쌓인 눈에 길인지 논인지
온 세상은 하얗게 파묻혔고
저 멀리 산등성이에
나무들만 간간이 보일뿐
도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버스도 운행할 수 없었던 그날
쌓인 눈위를 칼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이십리 길을 걸어
버스를 타고 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동생 수고했다"는 격려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던
맏형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우리의 인생길에
눈보라가 있어도
가야 할 길이라면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면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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