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로우 논쟁(1) 《행위와 은혜, 율법과 복음》의 관계
이 내용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에 대한 팀 켈러의 추천 서평을 정리한 것이다.

목회자들에게도 섞여있는 신학적 고민들
우리의 구원 : 칭의와 성화를 떠받드는 원리
율법은 유효한가? 율법은 폐기되었는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면서 왜 행위를 강조하나?
복음(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얻은 이후에 행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행위와 은혜, 율법과 복음》의 관계
https://youtu.be/3-QvhZxsjaA?si=u4873NaonwpNLsJH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곳 은혜로 들어가네
주님의 그 은혜
* 범죄한 우리가 어찌 서리요
어린양의 보혈이 깨끗케 하시네 *2
*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곳 은혜로 들어가네
주님의 그 은혜 *2
신학의 핵심논쟁
구원의 핵심 : 칭의와 성화
우리의 구원에 율법(선행)이 영향을 미치는가?
당신은 율법주의자인가? 율법폐기론자인가?
매로우(marrow, 骨髓) 논쟁은 종교개혁 이후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일어났던 논쟁이다.
근본 이유는 구원에 있어 《행위/은혜, 율법/복음》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지 않아서였다.
이 논쟁으로 교단이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매로우의 옹호자들이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를 받았고, 반대로 비판자 중 최소한 일부는 율법주의자로 오해를 받았다.
당시 교회들이 표준 문서로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원에 있어《칭의와 행위》에 관한 정의
제11장 칭의에 관한 가르침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성과(선행)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satisfaction, 배상, 만족시킴, 충족시켜 줌)'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 배상(賠償)은 법률용어로는 "남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이 그 손해를 물어 주는 것. 갚을 치룸"
11-1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그러므로 사람의 선행이 칭의의 이유는 되지 못한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은 확실한 성경의 증거이다.
11-2. 의롭다 하심의 수단인 믿음,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11-3. 전적인 은혜성, 그리스도가 순종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이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 모든 사람의 빚을 완전하게 갚아 주셨고,....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칭의는 오직 100%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선행)는 칭의에 단 0.1%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
이에 대한 사람의 "감사와 확신"에서 비롯한 복음적 순종, 곧 선행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11-1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1) 이 칭의는, 그들 속에 의를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더 나아가 그들의 존재를 의롭다고 간주하시어 기쁘게 받아 주심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그들 안에 이루어진 또는 그들에 의해서 성취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나 기타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간주하심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순종과 배상(satisfaction)을 그들에게 전가시키심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2)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영접하고 의지할 뿐이다. 이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칭의는 한 번 얻으면 잃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의 노여움" 아래 놓인다 해도 칭의는 취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의 죄들을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
1) 그들이 칭의의 상태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을 지라도
2) 그들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성적인 불쾌함 아래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죄들을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얼굴 빛은 그들을 향하여 회복되지 않는다.
당시에 매로우 논쟁에 참여했던 모든 목사들은 종교개혁의 신학과 개혁교회의 교리를 진술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이신칭의 :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명확하고 놀랍도록 자세히 강해한 문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교회의 분열
그런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편이 갈라져 상대를 율법폐기주의와 율법주의로 매도하고 결국
스코틀랜드의 한 교단이 완전히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구원얻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율법과 순종(선행)"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목회에서는 "율법주의인가? 율법폐기주의인가?" 에 대한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그래서 이러한 의식은 마음의 태도, 행동, 인격, 성경을 읽는 태도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설교에서도 나타난다. 싱클레어는 심지어 하난미에 대한 '느낌'에서도 율법주의를 형성하는 한 요소라고까지 말한다.
율법주의(적인) 특징
1. 율법주의적인 정신적 특징은 (어떤 것이나 일들에 있어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질투, 사소한 문제에 대한 과민성,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태도, 편협한 의사결정' 등을 들 수 있다.
'매로우 맨들'의 수장 격인 토머스 보스턴은 칭의에 관한 정확한 교리가 있음에도 실제로는 여전히 율법이 "삶의 규칙"이 아닌 "행위언약"인 것처럼 목회했던 시절을 솔직히 고백했다.
반대로 율법폐기주의 교리를 거부하면서도 실제 삶과 목회 속에서는 율법폐기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실제적 율법폐기주의는 기독교로 가장한
자기 수용의 세속적 복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더 자주 나타나는 형태는 목사의 설교와 목회에서 의무와 기쁨이 미묘하게 분리될 때 나타나는 율법폐기주의다. 목사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기쁜 일(하나님을 닮고 알며 기쁘게 해드리는 일로 제시하지 않으면 율법폐기주의의 정신은 퍼질 수밖에 없다.
2.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의 뿌리가 같다.
아마도 독자 대부분이 이것을 가장 유익한 통찰로 꼽게 될 것이다. 이 통찰은 그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발할 수 있는 통찰이다. 목회자들이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를 상극으로 여기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싱클레이는 둘이 "같은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한다. 그는 둘 모두의 근원이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한 거짓말"이라고 지목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과 안녕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면 많은 것을 놓쳐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입장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들을 우리에게 복을 주기 싫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또 둘다 순종을 은혜로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방법이나 우리가 창조된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 보지 않는다. 순종의 기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둘 다 순종을 조건적인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운 짐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우리가 지독히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복을 주시지 않는 분으로 본다.
둘의 유일한 차이점
1)율법주의는 마지못해 그 짐을 지는 반면 2)율법폐기주의는 하나님이 진정한 사랑이시라면 그런 짐을 요구하실 리가 없다며 그 짐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다. 율법폐기주의자들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개념을 유지하기 위해 그분이 순종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다.
3. 둘 중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엉뚱한 해법을 제시(내놓게) 된다.
즉,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다른 오류 쪽으로 한 발을 내딛게 된다.
싱클레어는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모두 하나님의 선하고도 은혜로운 성품을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
면 각 오류에 대한 해법이 기껏해야 다른 오류를 약간 다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율법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율법과
순종을 덜 강조하게 되고, 율법폐기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율법과 순종을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율법주의로 기운 사람에게 순종과 율법을 너무 따지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보지 못하는 율법폐기주의의 정신 쪽으로 그들을 몰아가는 것이다.
반대로, 율법폐기주의에 물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징벌과 불순종의 위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것은 은혜로 구원해주신 분을 높이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수단이 아닌 행위의 언약으로 율법을 보는 율법주의적인 정신 쪽으로 그들을 몰아가는 것이다.
4.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모두의 해법이 《복음》이다.
싱클레어의 말을 들어보자.
"복음은 우리를 <이 거짓말 : 율법주의와 율법 폐기주의>에서 구해낸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의 이면에 자신의 전부를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고, 그다음에는 우리 안에 거하실 성령을 보내주셨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치료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복음이 율법폐기주의에 대해 처방하는 치료제와 동일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실제로 맛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
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두 오류는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치료제도 똑같다.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관한 복음을 전해 순종을 즐거운 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둘 모두에 대한 해법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을 더 온전히, 더 성경에 맞게,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유익한 질문과 진술이 많다. 그중에서 두 가지만 소개하자면, 싱클레어는 E .P 샌더스가 주장하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¹이 어떤 식으로 율법주의적인 성경 읽기를 조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와 동시에, 구약의 법에 대한 전통적인 3단 분류법(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율법폐기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논쟁과 관련해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이어서)
참고1. 샌더스의 새관점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40,50여 년 전부터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f Paul, NPP, 이하 ‘새 관점’)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신약학계에 나타났다. 또
www.thetruthlighthouse.org
1.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뒤엎는 ‘새 관점’
샌더스의 ‘새 관점’은 구원론에 관한 또 다른 차원의 논의이고 더 자세히는 유대교 율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복음주의적 구원론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로마서, 히브리서 성경저자들 말씀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그 핵심이며 이는 루터와 칼빈으로 이어진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다.
또한 이 구원론은 로마서를 비롯한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도 입증되는데 바울은 당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했다.
구원을 이해하는 이러한 관점은 당시 유대인들이 ‘은혜’가 아닌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 위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만약 유대인들에게 ‘율법주의’가 없었고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그리고 바울도 궁극적으로는 율법주의를 비판했던 게 아니라면 지금의 구원론은 상당한 수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새 관점’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서 부터다.
샌더스는 유대교 문헌들을 살펴보았는데, 유대인에게도 은혜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존재했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 율법주의는 유대인 문헌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구원관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관은 수정되어야 한다면서 ‘새 관점’ 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샌더스의 주장은 지금까지 기독교는 유대교를 오해하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교 율법의 구원론 논의도 잘못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의 구원론에 수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유대교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종교이며 율법의 행위 강조한 ‘율법주의’는 없었다.”는 것이다.
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런 다음
②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③ 선택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④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⑤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선 보상하시고 불순종에 대해선 심판하신다.
⑥ 율법은 언약관계의 유지 및 재확립을 제공한다.
⑦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 구원받을 그룹에 속한다.
샌더스는 ①과 ⑦을 근거로 들어 ‘선택’과 ‘구원’은 인간의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적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강조한 종교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율법 인식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 nomism)로 명명했다. 이것이 기존의 ‘율법주의’와 다른 점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단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다. 율법 이전에 먼저 선택과 언약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은혜는 이스라엘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율법의 행위는 그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선한 행위는 언약 안에 머무르는 조건이지 그것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유대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게 샌더스의 견해다.
이런 ‘새 관점’ 주장은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와 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뒤엎는 것이다.
그럼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등에서 지속적으로 암시되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인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3:10-14과 로마서 3:19,20 등에서 분명 율법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새 관점’ 편에서 이 의문에 답한 사람이 영국 더럼대학교의 제임스 던(James D.G. Dunn)이다.
그에 따르면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 것은 그것이 유대인들의 독특한 민족적 종교적 표지로 작용해 십자가 사건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동등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결코 구원과의 직접적 관계에서 ‘율법주의’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던의 이런 해석은 바울 서신을 일종의 사회학점 관점에서 풀이한 것으로 기존의 해석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면 던의 해석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수평적 이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